[에세이 산책] 어느 남자 이야기

입력 2010-08-04 08:09:56

텔레비전에서 각막수술을 받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내의 코와 눈과 입술을 만졌다. 손의 감각만으로 느꼈던 아내를 직접 볼 수 있게 되자 그는 만감이 교차한 얼굴이 되었다. 의사가 남자에게 세상이 어떻게 보이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주변을 한참동안 두리번대다가 말했다. "세상은 온통 색깔로 뒤덮여 있군요."

남자는 아내의 손을 잡고 그가 그토록 원하던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남자의 눈은 어린 아이처럼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이게 지하철이구나, 이게 장미고, 이게 은행나무구나. 남자는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천진한 표정이었고 처음 대하는 사물들 앞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남자는 앞이 보이지 않을 때처럼 사물을 일일이 손으로 만졌다. 조심스럽게 더듬으며 기억 속 촉감과 맞춰보려 애썼고, 자신의 의식 속에 만들어져 있던 이미지와 대조해 나갔다. 이건 무슨 색이야? 남자는 아내가 입고 있는 티셔츠를 보며 말했다. 아내는 하늘색이라고 말해 주었다. 남자는 구름 낀 하늘과 아내의 티셔츠를 번갈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는 아내가 과자를 먹는 모습을 보았다. 무엇을 먹고 있는 모습은 그다지 예쁘게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빌딩과 사람, 집과 시장도 상상 속 이미지보다 못했다. 남자는 볼 수는 없었지만 자유로운 상상이 가능했던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어졌다.

바깥 세상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검정과 흰색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만 있던 남자에게 붉거나 노란, 지나치게 원색 칠갑인 세상은 이질적이었다. 외출이 즐겁지 않았다. 웅크리고 집에만 있었다. 상상속의 세계와 현실은 많이 달랐다. '다름' 앞에 그는 당황했다. 세상엔 고유의 색깔보다 인위적으로 덧칠해진 색이 많았다. 사람이 가진 색도 천차만별이었으며 눈에 보이는 색이 전체가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다.

누구나 환상을 갖고 있는 일에는 기대를 갖기 마련이다. 내가 보았을 때 남자의 상상력은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가지를 뻗고 있었다. 세상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순결하거나 겸허해질 만큼 투명하지만은 않다. 대리석 빌딩도 있지만 시궁창도 있고, 백화점이 있는 반면 난전도 있다. 그의 아내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은 음식을 우적우적 씹어 먹고, 눈곱이 붙은 눈을 부비며 잠에서 깨어난다.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의 참모습이다. 그 사실을 그가 미리 알았더라면, 눈을 뜨고 세상과 마주했을 때 그가 받아들일 충격의 강도가 훨씬 완화되지 않았을까.

임수진(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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