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노라면 누구나 행과 불행에 따라 웃다가 울다가 한다. 불행이 끈덕지게 달라붙는 그림자라면, 불운이라는 놈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채 예감할 낌새도, 마음 다잡을 틈조차 없이 덮쳐오고는 한다. 뜻하지 않은 남의 불운 앞에서 스스로의 불행을 잠시 위로 받을 수도 있겠지만, 스멀스멀 거리는 불안감마저 온전히 잠재울 도리는 없을 터다. 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마른 날 미리 지붕을 손보아 두거나, 따뜻한 날에 서둘러 땔감거리를 쌓아둔다. 아예 이웃끼리 품앗이로 강둑을 높이 올리고 봇물을 깊이 챙겨두기도 한다. 소 잃고서 빈 외양간 고치는 이웃의 불운을 마냥 비웃으면서 강 건너 불구경할 수만은 없는 법이니까.
'존 큐'(John Q, 2002년)는 미국 내부의 비판을 주류 영화의 극적인 반전으로 흥미롭게 풀어간다기에 애써 찾아본 영화다. 급박하게 심장이식수술을 받아야하는 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을 해보지만 끝내 무산되고,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인질극을 벌리는 눈물겨운 드라마가 펼쳐진다. 세계 최첨단의 의료와 서비스를 자랑하는 지상 천국과 전인구의 15%가 넘는 국민들이 의료사각지대로 내몰린 응달진 지옥이 공존하는 이상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한 가족의 불운과 파국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윤 극대화에만 눈먼 미국 민영의료보험제도 아래에서 벌어지는 매몰차고 음울한 풍경들이 병원, 복지기관과 관공서 등을 헤매면서 전개된다. 영화 말미에는 의료보험이 없는 5천만 명 중에서, 해마다 숱한 사람들이 변변한 치료 한 번 못 받아보고 죽어가는 현실들을 삽화처럼 보여주기도 한다.
"세상이 외면하는 아들! 세상에 맞서는 아버지!"라고 내걸린 광고 문안에서처럼, 꺼져가는 아들의 생명마저 외면하는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는 아버지의 고군분투를 다분히 할리우드식으로 담아낸 셈이다. 애당초 세상과 벌리는 사투를 눈물겹게 담아내던 영화는 은근슬쩍 '람보'식의, 박진감이 철철 흘러넘치는 활극으로 바뀐다. 양념이 넘치면 음식 본디 맛을 망쳐버리듯이, 당의정의 단맛에 길들여지면 아예 쓰디쓴 맛 자체의 존재마저 망각해버리기가 십상이다. 우람한 영웅의 출현으로 모든 악인들이 한순간에 참회의 눈물을 쏟아내고, 벙어리 냉가슴 앓던 이들의 환성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요지부동으로 버티던 현실의 벽이 제풀에 허물어지면서 꿈꾸듯이 기적이 찾아오고, 이윽고 온 세상에 정의와 평화가 물결친다고 팡파르를 울린다. 세상은 여전히, 완강하게 꿈쩍거릴 기미조차 없는데도 말이다.
사람으로서 살아갈 최소한의 건강과 생존권을 버텨줄 사회안전망이라는 그물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더 나은 품격과 생활권을 보장한다는 현수막 아래 팡파르로 눈멀고 귀 먹먹해지는 시절이다. 온갖 부나비들이 그토록 목을 매는 현란한 신기루가 실상은 영화 속 주인공이 목숨까지 걸고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던 통곡의 수렁이었음을 짐작이나 할까?
송광익<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