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식 위험하던 아이, 새벽 두시에 달려가 고비 넘겨
"천식과 비염, 아토피를 유발하는 소아알레르기는 치료가 잘 되는 질환입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죠." 천식이나 비염은 그렇다고 치고 아토피마저 치료가 잘 된다니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아토피 치료를 몇 달씩 받고도 아무런 차도가 없는 환아도 있을 것 아닙니까?" 아이꿈터아동병원 김명성(50) 병원장은 "그런 경우는 없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휴가도 반납하고 학회 참가
김 원장은 지역에서 알레르기, 특히 소아알레르기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뒤 치료에 나선 1세대 주자에 속한다. 10여년 전만 해도 알레르기는 불모지였다. 의과대학에서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았다. 지역 대학병원에서 이를 전공한 교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소아알레르기 치료가 보편화됐지만 정확히 18년 전 김 원장이 처음 이 분야에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주위에 물어볼 사람조차 없었다.
"운이 좋아서인지 1992년 레지던트를 마친 뒤 전문의를 따자마자 계명대 동산병원 소아과 교수로 부임하게 됐습니다. 선배 교수님이 알레르기를 공부해 보라고 권하더군요. 고생하더라도 의미 있는 분야인데다 나중에 각광받을 것이라고 했죠."
고생길이 훤히 보였지만 김 원장은 기꺼이 그 길을 택했다. "당시만 해도 관련 학회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소아알레르기연구회가 서울에서 만들어졌는데, 주도적으로 참가하는 사람이 전국에서 1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즐거웠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은 것, 잘 모르고 힘든 분야를 앞서서 한다는데 보람도 느꼈습니다. 전문서적과 학술잡지를 보며 본격적으로 파고 들었죠."
최신 의술을 접하기 위해 미국, 유럽 관련 학회도 빠지지 않았다. 연간 2차례, 30일 이내로 제한된 해외 학회 참석 기회는 그에게 너무 부족했다. 여름, 겨울 휴가도 반납하고 학회에 갔다. 그렇게 한 우물을 판 지 3년쯤 지나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천식 환자는 이전까지 기관지확장제만 투약했습니다. 치료를 아무리 해도 자꾸 재발했고, 사망률도 제자리였습니다. 기관지염증을 치료해야 알레르기 민감성이 낮아지는데 그걸 몰랐던거죠. 흡입용 스테로이드약도 개발돼 치료에 사용됐습니다."
알레르기 천식을 치료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반나절 외래 환자를 보는데 60, 70명씩 몰려들었다. 점심 식사도 제때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워낙 환자들이 밀려들다 보니 간호사들조차 김 교수 진료실에서 일하기를 꺼릴 정도였다.
◆알레르기는 부모와 함께 치료하는 것
김 원장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배앓이가 너무 심해서 병원에 갔더니 맹장염이라고 하더군요. 데굴데굴 구를 만큼 아팠는데 수술을 받고 나니 씻은 듯이 통증이 사라진 겁니다. 그때부터 줄곧 장래희망은 의사였고, 결국 그 꿈을 이루게 된 거죠." 왜 굳이 소아과를 택했느냐는 물음에 "원래부터 아이들이 좋았고,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때로는 알레르기 전문의답게 진지한 표정으로, 때로는 개구쟁이처럼 천진난만한 웃음을 띄며 환자들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번은 오전 2시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한 살배기 천식 환아의 아버지였는데 '우리 아이가 죽게 생겼으니 바로 와달라'는 겁니다." 몇 달 전 심한 천식증세 때문에 찾아온 아기가 떠올랐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깨기 전 꿈에서 김 원장은 온몸이 파랗게 질릴 만큼 천식으로 고통받는 그 아기를 봤다. 부리나케 달려간 그는 곧바로 치료에 나서 간신히 고비를 넘겼다.
"그 아기의 아버지가 지금도 우리 병원 홈페이지에 고맙다며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으면 지금 함께 있지 못할 그 아기가 지금은 고등학생이 됐다는 내용이었죠. 그런 일이 있을 때면 알레르기 전문 소아과의사가 된 게 뿌듯합니다."
그는 알레르기 치료는 부모와 함께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천식은 6개월 이상, 비염은 2개월 이상 악화되지 않아야 1차 치료가 성공한 것으로 본다. 아토피는 워낙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릴 수 있다. "환아 부모들을 따로 교육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잠시 치료하고 차도 없으면 포기하거나, 진척이 있으면 치료를 중단합니다. 알레르기 치료는 인내심과의 싸움입니다. 의사를 믿고, 치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게 중요합니다." 그는 매년 유럽면역알레르기학회에서 연제를 발표하고, 전국을 다니며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초청강연도 한다. 수만 건에 이르는 임상을 통해 쌓은 경험을 기꺼이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성공한 의사보다는 고마운 의사로
지난해 4월 그는 자신의 병원을 열었다. 대학병원 교수로, 꽤 많은 연봉을 받는 전문병원 의사로 남을 수 있었지만 그는 고집스레 자기 병원을 갖고 싶었다. "병원 문화를 바꾸고 싶었습니다. '아이꿈터'라는 이름도 제가 지었죠. 아이들이 비록 병원이지만 머물며 꿈을 꿀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개원은 쉽지 않았다. 문 열기 6개월 전에는 집에 불이 나서 온통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다행히 전기제품 하자 때문에 화재가 난 것으로 밝혀져서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간 모은 돈과 그때 받은 보상금 전부 지금 병원에 쏟아부은 것이죠." 알레르기 검사장비만큼은 웬만한 대학병원 못잖게 갖춰놓았다. 의료진 5명을 포함해 직원이 50여명에 이르는 제법 큰 병원을 갖출 수 있었다. 편하자고 생각하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즐기며 편하게 살면 좋겠지만 문득 가만히 있어서는 마지막 눈 감기 전에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후회한다는 잘못 산 인생이니까요. 그런 후회가 없도록 병원을 열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대구뿐 아니라 구미, 포항, 경산 등지에서도 환자가 찾아옵니다." 그는 성공한 의사로 기억되기보다는 곁에 있을 때 의지가 되고 고마운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이런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너 같은 아들을 두어서 행복했다. 부디 환자에게도 끝까지 잘 대해줘라.' 저는 참 많은 걸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아침마다 진료에 나서기 전 기도를 한다. '오늘도 마지막 환자를 볼 때까지 웃으며 맞을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 그는 늘 웃는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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