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歲月]6·25 터진 해 혼인하기로 했었는데…

입력 2010-06-07 07:54:56

60년 전 그 분 아직도 찾고 있는 한옥임 할머니

한옥임 할머니가 길가에서 주워 모은 깡통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애를 썼지만 자연스러운 포즈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한옥임 할머니가 길가에서 주워 모은 깡통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애를 썼지만 자연스러운 포즈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요즘도 한 할머니의 방에는 꽃한송이와 실타래가 있다. 한 할머니는 꽃은 한 중사를 기리는 할머니의 마음이고, 실타래는 그와 자신을 연결해주는 끈이라고 설명했다.
요즘도 한 할머니의 방에는 꽃한송이와 실타래가 있다. 한 할머니는 꽃은 한 중사를 기리는 할머니의 마음이고, 실타래는 그와 자신을 연결해주는 끈이라고 설명했다.

"부모님들이 인사를 나누었고 예단이 오고갔어요. 7월 27일 혼인하기로 돼 있었는데, 난데 없이 6·25전쟁이 터졌어요. 그 남자가 소속된 부대는 이동하게 됐는데, 트럭 앞에서 손 한번 잡고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었어요."

충북 청주가 고향인 한옥임(79·경북 영천시 거주)할머니는 19세이던 1950년 이종구(이정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중사를 만났다. 당시 6사단 7연대가 충북 청주 수정마을에 주둔했고, 이종구 중사는 본부 보급대 소속이었다. 한옥임 할머니에 따르면 이 중사는 한 할머니 집 근처에서 하숙했다.

(영외 거주로 보이나 전쟁 중 영외 거주라니, 확실하지 않다. 또 한옥임씨는 7월 27일 혼인 날짜를 기다리는 중에 전쟁이 터졌다고 말했지만 6·25전쟁은 이미 그전에 발발했으며, 국군의 전선이 무너지면서 강원도 소양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던 7연대 역시 후퇴해 충청도 청주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7월 중순을 지나면서 7연대는 다시 후퇴. 경상북도 이화령을 넘어 문경, 낙동강, 영천 방면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본지 '끝나지 않은 육이오' 필자 이용우씨 확인-)

두 사람은 주변 어른들(할머니, 대고모 할머니, 어머니)의 소개로 만났다. 이종구 중사는 대구가 고향이며 어머니가 포목점을 한다고 했다. 그는 멋쟁이였는데, 정복을 반듯하게 다림질해 입고 모자를 쓰고 다녔다. 동네 아가씨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이 중사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한옥임씨를 마음에 두고 어른들께 중매를 부탁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는데 선 보는 줄도 모르고 만났어요. 그렇게 어른들과 함께 만난 뒤로 이 중사는 어른들 몰래 찾아와서 나를 훔쳐보곤 했어요. '거기 누구냐'고 물으면 대답 없이 돌아가곤 했어요. 내 방 창문 너머로 메모지를 던져 넣곤 했는데, 읽어보지 않고 그냥 어머니께 드렸어요."

애틋한 마음을 키워가던 중에 정식으로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혼인 날짜까지 잡았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는 한 씨의 손목을 잡아끌고 7연대가 주둔해 있던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부대는 이미 철수 준비를 완료했고 이 중사는 한옥임씨의 얼굴이라도 보고 떠나겠노라며 트럭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이 중사는 그때 용기를 내 한옥임씨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못 만났습니다."

부대와 함께 떠난 이 중사는 그날부터 거의 매일 편지를 보내왔다. 언제나 '기다려 달라. 꼭 돌아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받은 편지는 옛날 우체부들이 들고 다니던 가방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많았다. 아버지가 우체국 직원이었기에 편지는 늘 아버지의 손을 거쳐서 왔다. 아버지는 이종구 중사가 보내온 편지를 볼 때마다 '미친 놈,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라며 혀를 찼다.

인민군의 공세는 점점 거셌고 한옥임씨 가족도 결국 피란을 떠났다. 피란길에도 예단을 모두 챙겨서 떠났는데 더 이상 들고 갈 수 없어 결국은 땅에 묻고 솥과 쌀만 지고 피란을 다녔다고 했다. 마을은 인민군 세상이 돼 버렸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더 이상 이 중사로부터 편지는 오지 않았다. 우편 망이 무너진 때문인지, 이 중사가 전사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어머니는 예비 사위의 생사를 알고 싶어 매일 밥을 떠서 부엌에 놓아두었다. (옛 사람들은 집 떠나 소식이 끊어진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기 위해 밥을 떠놓곤 했는데, 밥그릇에 '눈물'이 맺히면 죽은 것으로 간주하곤 했다.)

"처음엔 안 흘렸는데, 좀 있으니 밥그릇이 눈물을 흘리더구만요."

한씨는 이 중사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리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1년을 더 기다린 뒤 한옥임씨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며 아버지가 결혼을 추진했던 것이다. 남편과는 8년을 함께 살았고, 이혼했다.

이 중사와 헤어지고 60년이 지났지만 소식을 들은 적도 없고, 잊은 적도 없다. 한 할머니는 그가 죽었다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살아 있다면 또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요즘도 한 할머니의 방에는 꽃한송이와 실타래가 있다. 꽃은 한 중사를 기리는 할머니의 마음이고, 실타래는 그와 자신을 연결해주는 끈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이 중사의 영혼이 어디에 있든 실타래를 따라가기만 하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할머니는 6·25전쟁과 관련된 신문기사와 글을 스크랩해두고 있었다. 국가발전이나 조국, 새마을 운동 같은 기사들도 많이 모아두고 있었다. 입으로 애국이니 절약을 아무리 외쳐도 애국이 되지 않는다며 길에서 버려진 깡통을 모으고 있었다. 그가 그처럼 국가나 애국에 집착하는 것은 모진 경험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견뎌야 했고, 6·25전쟁 동안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마을을 점령하는 동안 양쪽으로부터 온갖 핍박과 회유, 폭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필생의 인연이었던 남자와 헤어진 것도 결국은 나라가 온전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한 할머니는 스크랩 여백에 따로 종이를 붙여 자신의 생각을 적어두기도 했는데, 이종구 중사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글도 보였다. 일제시대 소학교를 다닌 할머니는 한글이 서툴렀고 표현 중에는 일본식 표현도 섞여 있었다.

'이종구넌 착실한 구인니요다. 난데없는 6.25전쟁으로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죽었다면 무덤이라도 찾아가보고 싶어요. 가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알고 싶고."

1950년 당시 이종구 중사는 23~25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