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결단 공산군과 맞서 백병전, 美 지상군 사상자도 속출
낙동강 하류 돌출부에서 미 해병대 제3여단과 피아 간에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북한 공산군의 주력 제4돌격사단은 작전 개시 12일 만인 8월 18일 오후 엄청난 전력 손실을 입고 패퇴해 버렸다. 적은 미 해병대 주진지 앞에 자그마치 1천200여구의 전사자를 유기한 채 겨우 3천여명이 살아남아 낙동강을 다시 도하하여 서쪽 합천과 거창, 고령 방면으로 총퇴각하고 말았다. 승리의 깃발은 비로소 미 지상군을 향해 나부끼기 시작했다.
6·25전쟁 이래 줄곧 남침의 선봉으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내처 수원, 대전을 유린하면서 내내 거침없이 남진을 계속해온 공산군 4사단은 낙동강 돌출부에서 결국 부대 해체 위기를 맞았고 사단장 이건무 소장은 패장이 되고 말았다.
미 지상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사생결단하고 달려드는 공산군과 맞서 백병전까지 벌이다 보니 하루에도 100여명의 사상자를 감수해야 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미치광이 짓이나 다름이 없었다. 미 제24사단 주력 34연대는 8월 19일 이른 아침 낙동강변에서 공산군 소탕작전을 주도해온 미 해병대와 합류했다. 낙동강 돌출부에서 미 24사단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래 최초의 승리를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진주에서 마산 공격에 나선 공산군 6사단도 미 25사단에 녹아나고 있었다. 한때 호남 전역과 남해안을 거의 점령했던 6사단은 미 공군의 파상적인 공습에다 M-24 체피 탱크의 집중포화에는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북한 공산군은 개전 이래 불과 2개월 사이에 엄청난 전력의 손실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소대장 · 중대장급 하급 군관은 70% 이상, 대대장·연대장급 상급 군관은 50% 이상 전사하거나 교체되었고 사단장급은 개전 초기 주력부대를 지휘했던 제3·4·6사단의 이영호·이건무·방호산 소장 외에는 모두 교체되었다. 소련제 낡은 통신시설도 적의 패주에 한몫을 했다. 애초 소련의 군사 원조로 제공된 통신시설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사용하던 노후 장비로 고장이 잦은 데다 미 지상군의 집중포화에 두절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사단본부와 연대·대대 간에 횡적인 통신 연락이 되지 않아 개전 초기 한국군이 겪었던 것처럼 조직적인 퇴각을 하지 못해 전력 손실이 더욱 가중되기도 했다.
창황하게 퇴각하는 과정에서 통신수단의 잦은 두절로 연대는 예하부대인 대대에 철수 명령을 제대로 하달하지 못하고 대대 또한 중대나 소대에 알릴 겨를이 없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에만 급급했다. 이 바람에 각급 지휘군관들은 휘하의 전사들을 잃고 전사들은 지휘군관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특히 부상병들은 응급처치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낙오되거나 대부분 길거리에 내버려졌다. 무모한 공격 일변도 전술이 초래한 참극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대구·부산 점령을 위한 8월 공세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자 평양방송을 통해 황당한 전황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김무정 중장이 지휘하는 제2집단군은 완강히 저항하는 미제의 침략군과 연일 맹렬한 전투를 벌이며 남반부의 칠곡 왜관·다부동 남방 팔공산 일대에서 금호강에 육박, 대구를 위협하고 있다. 제2집단군의 일부는 이미 포항·경주·영천을 점령했다.
적의 우세한 공세에 부딪치고 있는 김웅 중장의 제1집단군은 이미 점령하고 있는 낙동강 동안(東岸)의 계선을 사수하고 부산으로 진격하기 위해 방어전에 돌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조선인민군의 진격에 당황한 미제와 남조선 졸도들은 예비병력까지 모두 쓸어넣고 대량의 전폭기와 땅끄(탱크), 중포의 지원하에 강력한 반격을 가해 오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 인민군대는 현재 전 전선에 걸쳐 가열한 혈투를 벌이고 있다.
우리 조선인민군은 6월 25일 남조선 도당의 북침에 반격을 개시한 이래 막대한 타격을 가하고 서울을 비롯한 남반부의 전 지역을 거진(거의) 해방했으나 미제 침략군이 대규모의 반격작전을 전개하였기에 낙동강 대안(對岸)의 적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해 고전하고 있다."
이는 적아(敵我·피아)의 전력이 완전히 역전돼 가는 상황에서 무모하게 총공격을 감행하다 실패한 8월 공세를 은폐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했다.
어쨌든 북한 공산군은 김일성의 황당한 작전지도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데다 퇴로가 막혀 조직적인 후퇴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각개약진으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낙동강 하류 전 전선에 걸쳐 비참한 후퇴작전에 돌입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8월 초부터 9월 초입에 들기까지 거의 한 달 동안 한반도 상공에는 미 공군기가 새까맣게 뒤덮었고 공습경보가 끊일 날이 없었다. 이미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전 시가지가 잿더미로 변해 버렸고 시민들은 공습을 피해 거의 시골로 피란을 떠나 도심은 텅 비었는데도 미 공군은 거의 매일같이 열탄을 퍼부어 불바다로 만들곤 했다.
"낙동강에서 거대한 불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전선사령부 정찰국 요원들이 공공연히 한마디씩 내뱉고 있었다. 수안보에 포진해 있던 전선사령부도 곧 서울로 철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만간에 서해안에서 인천으로 불어올 거대한 불폭풍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낙동강 돌출부를 점령해 밀양과 마산을 거쳐 부산의 목을 죄려던 8월 대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공격 방향을 다시 대구 방면으로 틀었다. 이른바 낙동강 중류의 9월 총공세. 전선사령관 김책 대장은 김일성의 정치 명령에 따라 8월 공세에서 남은 잔존병력과 장비를 모조리 대구 인접지역의 낙동강 교두보로 이동배치하고 낙동강 중류에서 제2전선을 구축한 제1·3·13·15사단에 대해 105탱크사단과 합류해 9월 총공세에 나서도록 작전명령을 하달한다.
공산군은 8월 공세에서 입은 손실로 인해 절대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편이었지만 편제상 총 13개 보병사단에 1개 기갑사단 등 10만 대군으로 9월 총공세에 돌입했다. 주공격로는 대구 전면. 제1·3·8·13사단 등 4개 사단(후에 15사단 합류)으로 대구 북방의 왜관~다부동의 주공선과 영천 배후에 맹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선 한·미 연합군은 왜관 동쪽 다부동 방면에 포진한 국군 제1사단과 서쪽의 미 제1기병사단이 주저항선을 형성, 방어전에 돌입해 있었다. 전투부대의 규모로 봐서는 한·미 연합군이 적 병력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낙동강 연안에 넓게 퍼진 유학산을 비롯한 작오산, 수암산 등 전략적 요충지에서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이며 연일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루기 일쑤였다.
이용우(언론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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