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밥·훈제·젓갈·쑥불구이… 육봉은어의 맛깔난 무한변신
낙동강 상류인 안동·봉화지역에서 회유하는 은어(銀魚)는 임금님 수랏상에만 오른 귀한 민물고기였다. 조선시대에는 법으로 정해서 일반인들은 잡지 못하게 하고 전담 관청을 두고 관리할 정도로 여타 지역 은어와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지역에는 보물 제305호 안동석빙고가 이 은어를 저장하는 얼음창고로 쓰였다는 기록과 이 은어를 잡아 훈제은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해방직후까지도 이 지역은 은어가 특산이었다.
비린내가 없고 향긋한 수박 냄새가 나는 은어는 담백하고 고소한 풍미와 웰빙성이 높고 영양가가 우수한 식재료로 꼽혀왔지만 황금색을 띤 빛깔과 적절한 크기, 앙증맞은 모양이 다양한 요리를 가능하게 해 전통음식 세계화의 소재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은어축제를 성공시킨 봉화의 다양한 강촌마을의 토속 은어음식을 통해 숨겨진 산업적 가치를 가늠해 본다.
◆산골 강촌의 다양한 전통 은어음식
낙동강 최상류계인 봉화에서 '은어'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영어조합 봉화은어' 대표 홍주선(60)씨다. 천연기념물 제74호인 열목어 연구가이기도 한 홍씨는 바다도 없는 산골 마을에 영어조합을 설립하고 봉화 은어축제를 성공적으로 이끈 주인공. 은어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찾아와 물어볼 정도이며 특히 은어요리 연구 분야는 국내에서 추종을 불허할 수준이다.
홍씨는 요즘도 평생을 함께해 온 은어에 푹 빠져 자연의 이웃인 수달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수달을 위해 저수지에 잉어를 풀어 두고 있다.
"무밥, 콩나물밥, 산나물밥처럼 산골에서 양식을 늘리기 위해 은어를 써 지은 밥이 은어밥입니다. 하지만 은어는 생선이 귀한 산골에서는 아주 특별한 먹을거리였지요."
홍씨가 직접 보여주는 강촌마을 은어밥은 밥을 짓다가 쌀이 갓 익을 무렵 잘 씻은 은어를 밥속에 꾹꾹 박아넣고 다시 한소큼 끓여낸다. 푹 뜸을 들인 후 먹기 전에 밥 위로 삐죽이 나온 은어꼬리를 살살 흔들어서 빼면 등뼈가 주르르 딸려 나와 가시가 제거된다. 여기에 참기름 간장을 붓고 비비기만 하면 부드럽고 고소한 은어밥이 된다. 약간 무르게 지어야 제 맛을 내는데 아이들과 노약자의 영양식으로 안성맞춤인 은어죽도 비슷한 방식으로 쑨다.
홍씨는 전통적인 봉화지역 은어 갈무리 방식을 활용해 은어훈제와 은어젓갈도 개발했다. 전통적인 훈제은어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한낮에 강가 너럭바위에 장작불을 피워 뜨겁게 달군 뒤 떡갈나무 잎을 깔아놓고 잡은 은어를 얹는다. 다시 나뭇잎을 덮고 그대로 두면 달궈진 바위의 은은한 불기운에 타지 않고 구워진 은어가 자연스럽게 햇볕에 말라 저녁 무렵이면 꾸덕꾸덕한 황금색의 훈제은어가 만들어진다. 이게 임금님 진상품이 되기도 했다.
"봉화에서는 지금도 은어젓갈로 제사를 지내는 집이 있는데 아주 부잣집에서만 씁니다. 은어젓갈로 만든 은어김치도 별미지요."
떡갈나무 넓은 잎을 항아리에 깔아놓고 소금 한켜 은어 한켜씩 쌓아 밀봉한 뒤 땅속에 묻어두면 이듬해 봄 입맛을 살려주는 짭짤하고도 감칠맛 나는 은어젓갈을 얻는다. 홍씨는 상품화에 나서 현재 8t의 은어젓갈이 숙성 중이다.
은어를 고아서 국수의 육수를 내기도 한다. 산간오지 강촌에서 은어가 멸치 역할을 대신해 온 것이다. 두충, 매실 등을 넣고 달인 간장으로 졸여낸 은어간장조림도 입안에 착착 달라붙는 독특한 맛이 놀라울 정도다. 마른쑥대를 지펴서 구워낸 은어쑥불구이도 쑥의 은은한 향이 배어나 산골 오지마을의 별미를 연출한다.
"일본에서는 은어요리가 수십 가지나 됩니다. 골목슈퍼에서도 은어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식품화도 잘 돼 있지요. 우리도 다양한 전통 은어요리가 전해지고 있는데 잘 알려지지 않고 상품화도 되지 못해 맥이 끊어질 형편입니다"홍씨는 오메가3가 풍부한 장수식품인 은어가 우리나라에서 대중적 음식재료가 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서 안타까워 했다.
◆낙동강 육봉은어의 산업적 가치
세계 3대 호수에 속하는 일본 히코네현의 호수 비와호에서 잡히는 은어는 연간 1천여t에 이른다. 바다를 잊고 호수를 근거로 서식하는 육봉화 은어다. 매년 수세를 받은 농지개량조합 측은 주민들에게 치어 방류 예산을 대주고 한 방울의 하수도 호수로 흘러들지 못하도록 집집마다 정화시설을 갖춰줬다. 이 덕분에 호수와 유입 하천에는 은어반 물반, 그야말로 은어 천국이다. 입어권을 산 낚시꾼들도 비와호로 흘러드는 강에서 여울낚시를 즐긴다. 이 은어는 일본 내륙어업협동조합을 통해 전국으로 팔려나간다.
일본 비와호와 마찬가지로 육봉은어가 서식하는 안동호도 연간 500t의 은어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게 홍씨의 주장이다. 안동호 상류의 봉화 청량산 앞 이나리강과 명호천,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등지는 천혜의 은어 여울낚시터로 전국 동호인들로부터 각광받는 곳이다. 일본처럼 농어촌공사에서 수세를 받아 치어 방류 예산을 확보, 지속적으로 방류해 안동호 육봉은어를 집중 육성할 경우 은어 자체의 특산화는 물론 수려한 산세와 어우러져 관광 명소로서의 가치도 발현시킬 수 있는 1석2조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강의 하구언과 인근 바다에서 치어 형태로 겨울을 나는 은어는 봄이 되면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회유어종이다. 여름이 지나 초가을 산란기가 되면 은어는 자갈이 많은 여울살에 알을 낳고 만 1년의 생을 마감한다. 이처럼 은어는 오염원에 노출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수명이 짧아 무공해에 가까운 청정 민물고기다.
"은어 음식을 만드는데 정성을 다하는 일본 사람들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마로 묶어 은은한 물에 이틀이나 삶아 다시 일본간장으로 졸여낸 은어조림 맛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메가3가 어느 생선보다 풍부하고 성질이 순하면서도 맛이 담백한 은어의 영양학적 가치는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알아준다. 일본인들이 꼬챙이에 꽂아 모닥불에 굽는 은어 꼬챙이 구이는 맛도 맛이지만 음식을 천천히 즐길 수 있는 운치도 일품이라고 한다.
◆봉화은어에 얽힌 스토리텔링
본초강목과 동의보감에 은어는 염증을 다스리는 소염제로 등장한다. 아기를 낳고 몸조리하는 산모에게 달여 먹였다. 예쁜 딸아이를 낳아달라고 기원할 때 임산부에게 은어를 달여 먹이기도 했다. 6월에 잡힌 손가락만한 은어는 말려놨다가 아이들의 감기 치료에 쓰기도 했다.
풍기군수를 지낸 퇴계선생이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지낼 때의 이야기다. 퇴계의 손자들이 도산서원 앞 낙동강에 올라온 은어를 함부로 잡는 바람에 강 하계에서 상계로 거처를 옮겨 손자들이 은어를 잡지 못하게 했다. 당시 퇴계는 임금님 진상품인 안동·봉화지역 은어를 잡지 못하도록 한 국법을 지키기 위해 아예 손자들을 데리고 이사한 것이다.
봉화에선 은어훈제를 잘못 관리해 파직당한 관리의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안동에는 그 반대의 이야기가 있다. 여름철에 잡은 은어를 잘 갈무리해서 겨울철 한양으로 진상해 임금으로부터 현감 벼슬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바로 예안현감 이매신의 이야기로 엄동설한에 강 얼음을 썰어 석빙고에 채우는 안동석빙고 장빙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봉화처럼 유속이 빠른 여울살과 냉수대에서 자란 은어는 육질이 단단해 좋은 젓갈과 훈제를 만들 수 있지만 물 흐름이 늦고 수온이 따뜻한 곳의 은어는 육질이 물러 가공하기에 적당하지 않아요."
다양한 스토리텔링 소재까지 모아 놓고 끊임없는 은어 상품화를 시도하고 있는 봉화은어 지킴이 홍씨는 이순(耳順)의 나이에도 은어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을 보여 주고 있다. 054)672-8778.
향토음식산업화특별취재팀 최재수기자 biochoi@msnet.co.kr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강병서기자 kbs@msnet.co.kr 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사진 프리랜서 강병두 plmnb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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