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던 약병아리는 맛있는 한끼로…
대학 2학년. 영미소설 시간의 교재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었다. 교수님은 미리 예습해오란 말씀만 하시고 그냥 줄줄 읽고는 "여기까지는 알겠제"하면 그만이었다. 동료들은 번역판을 구해 읽기도 했지만 책 한 권 사기가 어려웠던 나는 "알겠제" 하면 몰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진도가 나가기 시작하자 소설의 주인공인 허클베리 핀과 톰 소여가 나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미시시피 강을 배경으로 신나게 펼치는 장난기가 금호강을 무대로 뛰놀고 있는 나와 어찌 그리도 닮았는지 친근감이 들기 시작했다.
허크와 톰이 토굴 속에 갇혀 있는 흑인 짐을 구하기 위해 땅을 파는 장면에 이런 대화가 나온다. "톰, 땅을 팔 삽이 있어야지." "여기 주머니칼이 있어." "잘 됐어." "그러면 우린 주머니칼이라 부르지 말고 삽이라 부르기로 하자." "그래, 좋은 생각이야." "삽 일루 넘겨줘." "허크, 삽 여기 있어. 어서 파 봐." 안 그래도 며칠 전에 강둑에 낡은 냄비 하나를 숨겨두고 왔기 때문에 강의를 들으면서도 웃음이 절로 났다.
#나와 닮은 '허클베리핀의 모험' 주인공들
그래서 이 소설은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을 찍어 둔 사진첩 같아 들춰볼 때마다 애착이 가 혼자서 웃는 경우가 허다하다. 허크와 톰의 미시시피는 거대한 강이지만 나의 금호강은 그에 비하면 샛강 수준이다. 그러나 강변에 묻혀 있는 이야기는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처럼 절대로 만만치 않다.
봄이 오면 겨우내 맨살로 떨었던 나무들은 놀라운 은총 속에 잎과 꽃을 피워낸다. 태양빛을 받은 강물은 물결 위에 미리내를 내리게 하여 반짝반짝 부신 눈을 더욱 눈부시게 만든다. 먼 하늘의 아지랑이도 바라보면 볼수록 어질 머리가 돌 정도로 축복의 대열에 한몫 낀다. 푸른 초원으로 변한 강둑에는 봄을 희롱하는 소녀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와 재잘거림이 이곳을 아주 쉽게 낙원으로 만들어 버린다.
#금호강변에 냄비 하나 숨겨두고 매주 모여
대학생이긴 하나 아직 아이 티를 벗지 못한 또래들이 뭔가 재미난 장난거리를 생각하다가 짜내고 짜낸 결과가 바로 냄비로 귀착됐다. 간략하게 말하면 냄비에 넣어 끓일 것만 마련되면 강변으로 달려나가 행동으로 옮기자는 것이다. 학교가 일찍 파하는 토요일을 모이는 날로 정했다. 당시만 해도 먹을거리가 귀한 시절이어서 무엇이든 냄비에 넣어 찌지거나 볶거나 끓이면 맛없는 것이 없었다.
하루는 아무리 궁리해도 묘수를 얻지 못하고 쌀 한 줌과 왕소금 한 주먹을 준비하여 무작정 강변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별다른 재료가 없으면 피라미라도 잡아 어죽을 끓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으로 가 외동아들인 이삭을 잡아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려 할 때 시험을 끝낸 하나님이 풀숲에 뿔이 걸린 숫양을 제물로 내려 준 것과 거의 같은 현상이 내 앞에 펼쳐진 것이다.
#구둣발에 걷어차인 병아리 널브러지고
좁은 고샅을 돌아 이제 한 집만 지나면 들판이다. 그런데 삼계탕용 병아리보다 좀 더 큰 약병아리 한 마리가 겁도 없이 내 앞에서 얼찐거리고 있었다. '투 비 오어 낫 투 비'(to be or not to be, '죽느냐 사느냐'·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 3막 1장에 나오는 명대사)와 같은 그런 햄릿식 안가(安價)한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똥구둣발로 걷어차 버렸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저질러진 일이다. 약병아리는 돌담에 머리를 맞고 널브러졌다. "오늘 아브라함의 후예가 하나님 앞에 올리는 번제의 제수 물품은 약병아리 올습니다. 제사를 지낸 후 잘 먹겠습니다. 아멘."
혹시 남이 볼세라 병아리를 봉지 속에 쑤셔넣었다. 강변에 도착하니 개선장군이나 진배 없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삭정이를 주워 불을 때고 날렵한 솜씨로 병아리를 잡아 고물냄비가 넘치도록 닭죽을 끓였다. 허크와 톰도 부러워했을 이 포만! 이 행복!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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