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년 후백제 견훤 별동대, 지룡산성 출발해 경주 유린
운문분맥 여러 산줄기 중 우리가 각별히 살핀 것은 '문복능선'과 '호거능선'이다. 둘은 모체인 운문분맥과 합세해 청도 운문면의 커다란 별개 공간을 구획 짓는다. 그 맨 위에 신원리(新院里), 다음에 오진리(梧津里), 그 아래에 방음리(芳音里)가 있고, 동창천 가까이에 수몰된 순지(蓴池)·서지(西芝)·대천(大川) 등 3개 마을이 있었다.
그 최상류 신원리 공간은 넓이가 어마어마하다. 우리가 열심히 걸어온 학대산~운문령~가지산~아랫재~운문산~딱밭재~호거산 사이 운문분맥 14㎞ 구간이 모두 그 한 마을 남쪽 능선에 불과하다. 호거능선은 그 땅의 서편 담장 역할을 맡고 문복능선은 동편 담장 일을 담당한다. 이렇게 굉장한 산줄기와 면적을 독점한 마을이 전국에 몇이나 있으려나 싶다.
신원리 공간은 서편 '운문천(雲門川)계곡'과 동편 '신원천(新院川)계곡'으로 크게 나뉜다. 운문사 입구 신원리 마을 안 '문명분교'(초등학교) 즈음에서 갈라져 가는 두 도로 중 동편 것이 언양을 향해 신원천계곡(삼계계곡)으로 들어가는 길, 서편 것이 운문사를 거쳐 운문천계곡(운문사계곡)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 삼거리 밀성 손씨 묘원은 두 도로의 분기점이다.
저 두 공간을 갈라붙이는 분수령은 가지산 귀바위봉서 북으로 출발한다 했던 '지룡능선'이다. 운문사 입구 '복호산'(伏虎山)까지 8㎞가량 내리달린다. 방음리·오진리를 거쳐 운문사로 들어가면서 볼 때 전면으로 매우 높게 돌출하는 게 복호산이다.
복호산은 운문사 입구서 볼 때 그 형상이 엎드린 범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두 개로 나누어져 있는 봉우리가 그런 모습을 연출하는지 모를 일이다. 묘원을 거쳐 오를 때 그 중 먼저 나타나는 것은 해발 643m 암봉이다. 해발 170m 정도인 출발점에서 순식간에 470여m 솟아오른다. 그러다 보니 직벽(直壁)을 밧줄에 매달려 올라야 함은 물론, 한 사람이 다 오르고 난 뒤에야 뒷사람이 출발할 수 있어 오르는 데 시간이 매우 많이 걸린다.
정점은 두 번째 봉우리다. 해발 681m. 거기서는 산줄기가 동·서 두 방향으로 나뉘어 간다. 서쪽 것은 직진 정방향 같아 보이지만 기실 '북대암'(北臺庵)이라는 암자 위로 떨어져 내리는 지릉이다. 그 사면의 깎아지른 절벽이 장관이다. 거기 올라서면 저 남쪽 운문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북대'라는 암자 이름도 운문사 북쪽 높은 대라 해서 붙여진 것일 터이다. 절벽의 위용은 운문사 큰절에서 보면 금방 느낄 수 있다.
동편으로 굽어가는 듯한 복호능선 마루금을 바로 타고 들면 얼마 후 586m재로 잠깐 낮아졌다가 659m봉, 667m봉으로 다시 높아진다. 이 667m봉에서도 서쪽으로 지릉이 하나 갈라져 나가, 앞서 복호산서 출발한 지릉과 호응해 북대암 골짜기를 형성한다.
이 골짜기는 아랫부분이 가파른 반면 위는 평평하고 널찍하다. 그게 바로 '지룡산성' 터다. 이 산성은 동편 삼계계곡을 지키기 위한 요새가 아니었나 싶다. 울산 쪽에서 운문령을 넘어 와 동창천을 타고 청도나 밀양으로 건너갈 때의 길목이 거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 산성에 얽힌 전설은 후백제 견훤 것이다. 서기 927년 경주를 유린한 군대가 이 산성서 출동한 그의 별동대였다는 얘기도 그 중 하나다. 일부서는 아예 견훤이 이곳 출신일 가능성까지 말한다. 견훤의 출생 전설인 '지렁이신랑' 이야기가 이 산성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게 원인인가 싶다.
어떤 처녀에게 좋은 가마를 타고 밤에만 찾아오는 미남 신랑이 있었다는 게 전설의 시작이다. 그게 누군지 밝히기 위해 두루마기에다 바늘을 꽂고 실을 꿰어 놨더니 실은 우물로 연결돼 있었고 바늘은 지렁이 몸에 꽂혀 있었다. 그 지렁이가 바로 지룡산성의 '지룡'(地龍)이고 그 아들이 견훤이라는 얘기다. 지금 걷는 산줄기에 '지룡능선'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도 이 전설을 주목해서다.
한데 '지룡산'이란 표석은 이상하게도 이 산덩이 두 봉우리 중 높은 667m봉을 놔두고 하필 낮은 659m봉에 세워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표석도 사실은 얼마 전까지 681m봉에 있던 것이다. 681m봉에 복호산이라는 본래 이름을 회복시켜야 한다며 누군가가 이리로 쫓아낸 것이다. 국가 지형도가 659m봉을 지룡산이라고 지목해뒀으니 이리 옮기는 게 맞다는 설명문이 나붙어 있다.
그러나 산 아래 신원리 어르신들은 지룡산이라는 이름은 들은 적 없다고 했다. 681m봉은 예부터 복호산이라 불러왔고, 지금 지룡산이라는 곳은 '지룡산성'이라는 산성 이름으로 지목해 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반면 어떤 이는 옛날엔 일대 산덩이를 모두 합쳐 지룡산으로 지칭했으리라 확신했다. 20세기 들어 어려운 일들이 겹치자 그걸 '지렁이' 탓으로 돌리고는 681m봉만 '복호산'으로 떼어 부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어쨌든 지형도가 659m봉을 지룡산이라고 지목한 것은 잘못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주민들이 지룡산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바로 옆에 더 높은 봉우리를 두고 하필 그걸 지목할 가능성은 낮다. 지형도를 맹신하며 따르는 사람들도 안타깝다. 몰라서 그렇지, 지형도 지명 표기에는 오류가 너무 많다.
이 659m봉과 복호산 사이 능선의 동북편에 있는 '선(先)삼밭골'에는 지렁이 신랑이 처녀네 집을 왕래할 때 타고 다니던 가마였다는 '가마바위'가 있다. 1997년 청도군청사 신축 이전 때 그 앞마당으로 옮겨갔지만 가마바위 인접해서는 가마채로 여겨지던 각목 모양의 돌기둥도 있었다. 신랑이 지렁이임이 밝혀지는 순간 뇌성벽력과 함께 돌로 변한 것들이라고 전설은 전한다.
659m봉, 667m봉을 지나고 나면 복호능선은 558m재로 많이 숙였다가 823m봉으로 더 높게 솟구친다. 사리암(邪離庵) 위에 솟은 봉우리다. 558m재를 경계로 해서 복호산 덩어리와 사리암 산덩이가 갈라지는 것이다.
823m봉도 내원골과 사리암 골이 갈리는 분계점이다. 거기서 서편으로 내려가는 지릉이 경계선이 되는 것이다. 667m봉 지릉서부터 펼쳐져 온 내원암 골은 그로써 마감된다. 그 너머 동편 기슭에도 큰 골이 있는바, 그 이름 역시 '내원골'이라 했다.
지금 올라서는 사리암 산덩이는 워낙 높고 커서 일대 어디서 봐도 뚜렷이 솟아 보인다. 하지만 그건 그만큼 등산객들에게 부담스런 산덩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재에서 260여m나 쳐 올라야 할 뿐 아니라 정점서는 숨 돌릴 틈도 없이 310여m를 거꾸로 떨어져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려서서 닿는 잘록이가 유명한 '배너미재'다. 해발 506m. 지룡능선 들머리서 4.8㎞ 정도 떨어져 있으니 전체 노정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셈이다. 재 양편으로 상당히 큰 골이 형성돼 있으며, 둘은 공히 '배너미골'로 불린다.
배너미재 이후 남은 산길은 줄곧 오름세다. 종점인 운문분맥 귀바위봉까지 600m 이상의 고도를 쳐올려야 한다. 힘들 거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깊은 재 오르내리기보다는 이게 더 마음 편할 수 있다. 인생살이에서 또한 기복을 더 견디기 힘들어하는 우리네 습성 때문이라고나 할까.
출발 후 머잖아 도달하는 815m봉은 마치 정상에 도달한 듯 착각하게 하는 지점이다. 갑자기 훤칠한 학소대골(속칭 학심이골)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 봉우리서 출발해 내려서는 배너미골과의 경계 산줄기를 넘어선 게 시야가 트인 원인이다.
배너미재에서 40여분 걸리는 지점에서는 또 다른 특별한 전망대를 만난다. 북동편으로 저 멀리 낙동정맥 오봉산·당고개·단석산 구간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곳이다. 동편 학대산 쪽으로도 잠깐 시야가 틔어 고헌산까지 솟구쳐 오른다. 반가운 풍경이다.
거기서 10분 거리에 1,038m봉이 있다. 저명한 '쌍두봉' 능선이 갈라져 내려가는 분기점이다. 신원천계곡(삼계계곡)의 배너미골 중 절반은 이 능선과 복호능선 사이에 형성된 것이다. 이 봉우리를 인터넷에서 '황등산'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허황된 것이라 했다. 그 인근에 있는 '황정등'이라는 등성이 이름을 누군가 잘못 듣고 이런 일을 벌여놨다는 얘기다.
그 정점 헬기장서 쌍두봉 능선을 타고 5분쯤 내려가면 잘록이고, 3분가량 오르면 쌍두봉 중 높은 929m봉에 도달한다. 사방이 암괴절벽인 그곳에 서 있는 표석이 앙증맞긴 하나 910m라는 높이 표시는 오류다. 두 번째 862m봉은 10분쯤 더 내려서야 만난다. 그 아래 구간에도 좋은 암릉이 많다.
1,038m봉 이후 복호능선은 조금 낮아지다가 1,001m봉에 이른다. 동쪽 비탈로 내려가서 '운문산휴양림' 계곡의 북편 담장이 돼 주는 산줄기의 출발점이다. 그리로 내려서면 '용미폭포' '부처바위' 등을 구경할 수 있다. 그 1,001m봉을 지나면 1,042m봉 1,053m봉 순으로 점차 높아져 종착점인 귀바위봉에 닿는다.
어느 날 맨 아래쪽 손씨 문중 묘원서 출발해 귀바위봉까지 지룡능선을 걸었더니 점심시간 포함해 무려 5시간30분이나 걸렸다. 거리는 8㎞ 정도밖에 안 되지만 결코 가벼운 코스가 아니고 구경거리도 그만큼 많다는 말일 터이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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