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미술 산책] 뒷골목

입력 2010-04-17 07:55:56

지금도 낯익은 듯 친숙한 대구 뒷골목의 정취

시가지 중심에 있는 어느 뒷골목 풍광을 신선한 수채화의 감각적인 색채와 시원시원한 필치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손수레에 채소를 싣고 온 상인과 반찬거리를 고르는 여인의 모습, 지나가는 행인들이 1930년대 작품 속의 장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여전히 평범한 일상의 모습처럼 비친다. 그림의 좌우가 햇빛과 그늘로 선명하게 나누어져 화면의 영상이 더욱 또렷하고 생기 있게 보인다. 높은 처마 밑에 드리워진 그늘 쪽에서 대각선 방향 길 저편 끝을 향한 시선에 늘어선 전봇대와 적벽돌 담장, 2층 목조 점포들, 그리고 큰길로 나가는 골목 끝 박공지붕의 흰 석조건물의 뒷모습이 차례로 들어온다. 생활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골목 안의 정겨운 분위기를 찾아 잘 나타낸 그림이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동진의 이 작품은 제11회 조선미전에 출품돼 그림의 제작시기와 그의 발전 경향을 함께 가늠하는 데 표준이 될 만한 작품이다. 명암의 콘트라스트가 강하고 농담이 극명하게 차이 나는 채색과 과감하고 확신에 찬 붓놀림에서 자신감 넘치는 표현을 느낄 수 있는데, 작가의 수준이 절정에 도달해 있음을 짐작게 한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활달한 붓질과 수려한 색채감이 느껴진다.

수채화는 수묵의 표현과 재질상의 유사한 특성 때문에 당시 산수화에 친숙한 우리 민족의 정서에 보다 쉽게 다가왔을지 모른다. 양화 도입기에 유화가 아닌 수채화로 시작해 대구를 근대미술의 중심 고장이 되게 하는 데 구심적인 역할을 한 그는 남아 있는 작품들을 통해 대구미술의 위상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특히 수채화는 즉흥적인 현장의 감흥과 그때그때의 일기와 시간 같은 계절의 기분을 나타내기 좋은 매체다. 이 그림 속 인물들의 복장이나 수목 표현에서도 싱그러운 계절감을 느낄 수 있어 아마도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중간 대구의 날씨를 드러낸 것이 아닐까. 이 해에 조선미전도 5월에 열렸다. 그림 하단 우측에 이전까지 써오던 영문 이니셜 대신에 'TongChin'이란 새 서명을 적고 있다. 또 지금까지의 담채 대신에 진한 물감의 사용이 눈에 띄고 흰색을 비롯한 불투명 수채화 물감의 사용이 새로 보인다.

그의 작품 목록을 보면 뒷골목이란 제목이 유독 많은데, 당시 서민들의 살림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작가의 태도가 전달되는 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그의 주요 작품들을 살펴보면 생전 인터뷰에서 서민 생활의 애환을 담으려 했다는 말 대로인 것 같다. 은행 건물이나 행인의 발걸음이 분주한 거리, 우뚝한 공장 건물들은 시대의 방관자로서 관조적 자세를 취한 탐미주의자의 시각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모두 서민들의 생활을 비춰보게 하거나 당시의 살림을 반영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 작품 이후로 그의 선전 출품 소식은 중단된다. 그 뒤에도 향토회와 대표적인 지역 미술전람회에 몇 번 더 출품한 기록은 보이지만 고작 2, 3점에 불과하고 제목도 대부분 '습작'으로 하고 있어 이전의 활발했던 제작에서 한걸음씩 물러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김영동·미술평론가

뒷골목

작가:서동진

크기:49×62㎝

재료:종이에 수채

연도:1932년

소장: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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