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모녀가 선택한 '다른 세상'
주황머리 엄마, 초록머리 맏딸, 검은머리 둘째.
세 모녀는 머리 색깔만큼이나 평범하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엄마는 결혼 후 돌연 귀농을 했고, 딸들은 학교 대신 학교 밖을 선택했다.
세 모녀의 알콩달콩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 초콜릿 내껀데?"
"언니는 초콜릿 먹지도 않으면서. 엄마! 언니 좀 봐."
"얘들아, 나눠먹으면 되잖아. 틈만 나면 툭닥거리네."
엄마 서경희(45·경북 영천시 녹전동)씨와 큰딸 김수민(20)양, 작은딸 민정(17)양은 여느 모녀와 똑같다. 머리 색깔만 빼면 말이다.
하지만 이들이 걸어온 행적은 범상치 않다. 유복한 시절을 보내며 걱정 없이 살던 서씨 부부는 12년 전, 덜컥 귀농을 선택했다. 당시엔 '귀농'이란 말 자체도 흔치 않던 시절이다. 남편의 직장이었던 일본 국립 기초생물학연구소를 박차고 나와 택한 귀농은 이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영천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서씨의 고민이 시작됐다. "학교보다 내 행동을 통해 배우는 것이 많을 거라 생각했어요. 적어도 올바르지 않은 일에 눈감지 않겠다고 작정했죠." 영천에서 딸 수민이를 초등학교에 보내면서 하나씩 실천에 옮겼다. 유연하지 못한 학교 체제와 싸워가며 서울의 극단을 초청해 공연을 보여주기도 하고 화가를 불러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학교는 달랐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기분이랄까. "아이한테 할 말이 없어졌죠. 옳지는 않지만 그냥 학교를 따라가라고 하기는 싫었어요."
이 상태의 공교육은 '아니다' 싶었다. 아이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결과 큰딸 수민이는 홈스쿨링(Home schooling)을 택했다. 작은딸은 중학교 과정은 대안학교를 택했고 지금은 홈스쿨링 중이다. '홈스쿨링'이라 하면 부모가 자식에게 뭔가 가르쳐야 할 것 같지만 서씨 모녀의 선택은 다르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나뉘는 게 아니라, 그냥 같이 배우는 거죠."
홈스쿨링을 하면 '아이들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집에 머무를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쁘다. 수민이는 전국 학생 세미나를 주도하기도 하고 지난해엔 '염리동, 소금마을 이야기'란 책을 친구들과 펴냈다. 국악, 영어, 인문학, 철학 등 장르를 막론하고 배움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배운다. 세상 그 어느 곳이라도 이들 자매에겐 학교인 셈이다.
"서울에는 아이들이 듣고 싶은 다양한 프로그램이 많아요. 한평이 채 안 되는 고시원에서 딸 둘이 돌아누울 자리 없이 공부를 한 적도 있어요. 힘들었지만, 많이 자랐겠죠."
그들이 걸어온 길은 깊은 고민과 치열한 갈등을 통해 나온 결론이다. 무엇 하나 통념대로 수월하게 결정한 것은 없다.
수민이도 20대에 들어서자 대학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10대에는 하고 싶은 일이 워낙 많아 정신없이 보냈어요. 이제 내가 배운 걸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죠."
10대 후반에 벌써 자신의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공교육에서 바라보면 수민이의 주체적인 결정이 부럽다. 지난해부터는 직업 체험을 하고 있다. "대안학교에서 애들도 가르쳐보고 출판사에서 일도 하고. 내 길을 찾기 위해 모색하는 중이에요."
오히려 엄마가 딸보다 더 이상적이다. "평생 남을 위해 구호활동하며 살아볼 생각은 없니?" 딸이 이 세상에서 '선택적 약자'로 살아줬으면 하는 게 철없는 엄마의 바람이지만 딸 수민이는 오히려 현실적이다. 요즘 수민이는 국립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하루 10시간 이상 책과 씨름한다. 인문, 철학, 등 온갖 분야의 책을 섭렵하며 한달 400권 독파를 목표로 삼고 있다.
둘째 민정이는 미술에 관심이 많아 미술학원에 다니고 있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것에 반대하는 세 모녀. 배움의 문을 열어놓으면 필요할 때 언제든 배울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엄마 서씨는 사교육 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는 소모임 '샘밑부모배움터'(http://cafe.naver.com/semmitdream)를 진행하고 있다. 서씨의 내공이 입소문을 타면서 대구에서 영천까지 함께 공부하자며 달려온 열혈 엄마들이 계기가 됐다.
초등학생, 중학생 엄마들이 스스로 하는 영어학습법, 독서 교육, 부모 교육, 교육 심리 등을 공부하며 아이와 함께 성장하고 있다. 남편을 도와 영천에서 농사도 짓는다.
2년 전 세 모녀가 나눴던 대화는 가족이 지금도 '명언'으로 꼽는다.
"엄마가 너희들을 가르치지 않아 미안해."
"엄마, 그건 교육의 본질이 아니야. 엄마는 엄마 인생 살아. 엄마 인생도 잘 못 살면서."
엄마는 아이들에게 늘 감사한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세상을 만날 수 있었어요.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알 속이 우주의 전부인 줄 알고 살고 있었을 테죠."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서경희씨가 홈페이지에 올려둔 노랫말
꿈꾸지 않으면(양희창 작사, 장혜선 작곡)
꿈 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가네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리 알고 있네 우리 알고 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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