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초고가 선물용 상품권 왜?
지난 설 명절, 롯데백화점은 5천만원짜리 상품권을 내놨다. 물론 한장도 팔리지 않았다. 전 세계 786병만 만들어져 '왕의 코냑' 또는 '코냑의 왕'으로 불리는 2천만원짜리 레미마틴 루이 13세 레어캐스크도 설 명절 초고가 상품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사 간 사람은 없었다.
모두 선물 마련하느라 북적이는 백화점에서 찾는 이 없이 진열대를 지켜야 하는 초고가 상품들. 하지만 백화점들은 명절 때만 되면 앞다퉈 '초고가' '명품' 선물을 내놓는다. 누가 더 비싼 상품을 확보했느냐 경쟁이라도 하듯이.
◆최고 중의 최고, VVIP를 위한 선물
이번 설 대구의 백화점에서 판매된 가장 비싼 선물은 1천만원짜리 상품권으로 알려졌다. 롯데백화점에서 준비한 5천만원, 1천만원, 300만원의 '롯데상품권 프레스티지 패키지 한정판매' 중 1천만원짜리 상품권이 90여세트가량 판매된 것. 롯데 측은 "성서공단에 있는 지역의 기업체에서 법인카드로 대량 구매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밝혔다. 5천만원, 1천만원, 300만원 상품권 세트는 한 장으로 된 것이 아니라 50만원 혹은 30만원 등의 소액권을 박스로 구성한 것이다. 상품권 장당 가격 구성이 너무 높다 보면 사용이 불편하기 때문이라고.
상품권을 제외하고 가장 최고가에 팔린 품목은 단연 위스키다. 올 설에는 600만원짜리 조니워커 블루 애니버셔리가 팔렸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지난해에도 600만원짜리 조니워커를 사 간 고객이 올해 역시 조니워커 몇병을 구매했다"며 "그 고객은 이 외에도 150만원짜리 샤토 무통 로칠드 10여병을 구매해 설 선물용으로만 3천만원 정도의 주류를 사갔다"고 밝혔다.
대구백화점은 올해 368만원짜리 와인 '샤토 페트리스'와, 265만원대 위스키 '뽈리냑'을 준비했지만 판매하지 못했고, 동아백화점은 259만원짜리 루이 13세를 준비했지만 역시 아무도 찾는 이가 없었다.
대신 100만~130만원짜리 명품 한우세트는 수십세트가 팔려나갔고 100만원 이상의 천삼 관련 제품으로 채워진 홍삼 역시 10여세트 이상 팔려 인기를 얻었다. 심지어 33㎝ 이상의 참굴비 10마리로 채워진 200만원짜리 굴비 세트도 판매됐고, 70만~90만원대의 와인과 코냑도 각 백화점별로 10여병씩 팔렸다.
◆왜 백화점들은 초고가 경쟁을 하나?
백화점들이 어지간한 차 한대 값을 능가하는 초고가 선물에 집착하는 이유는 '전시 효과'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2000년대 이후 백화점들끼리의 경쟁이 과열되면서 최고가 선물세트 확보를 통해 '고급백화점'이라는 이미지를 홍보하는 것이다.
백화점 관계자는 "대형소매점이나 다른 소매점과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10여년 전 대형소매점이 속속 등장하면서 저가 선물을 찾는 고객들은 대형소매점으로, 고급 선물을 찾는 고객들은 백화점으로 이원화됐다. 그 후 백화점으로서는 '고급'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만이 대형소매점과의 가격 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이야기다.
'부자아빠의 몰락'(원제 Falling Behind)이라는 책을 쓴 로버트 프랭크 미국 코넬대 교수는 "좀 더 비싼 제품을 광고함으로써 소비자들의 구매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수천만원대를 호가하는 제품 광고를 보고 난 뒤에는 '수십만원짜리 선물쯤이야'라는 심리가 만들어진다는 것.
미국에서도 한국 백화점들의 초고가 선물 경쟁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등장하는 상품 카탈로그 책자 표지는 수천만달러의 보석으로 장식된 브래지어로 채워지는데 그 가격은 매년 급상승 중이란 사실이다. 1996년 클라우디아 시퍼가 100만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브래지어를 한 표지가 등장한 이래 2005년에는 1천250만달러(약 143억7천500만원)짜리 브래지어가 표지를 장식했지만 단 한번도 팔린 적은 없다. 프랭크 교수는 "카탈로그에 이런 의류를 게재한 것 자체가 수백만 고객의 참조 틀을 변화시켜 100달러짜리 속옷이라도 선물하도록 동기를 유발한다"고 풀이했다.
◆초고가 상품의 변천사
2000년대 들어 초고가 상품의 대명사는 단연 위스키와 와인이 돼 버렸다. 하지만 이런 초고가 상품도 시대별로 진화해왔다. 시대별로 대표적인 명절 선물이 바뀌듯 초고가 상품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
1970년대 초고가 선물은 단연 가전제품이 손꼽혔다. 대구백화점에서 70년대 최고가로 판매된 제품은 47만5천원짜리 냉장고. 당시 식용유와 치약, 와이셔츠 등의 일반적인 선물 가격대가 3천~5천원 내외였던 것을 감안하면 150배에 달하는 엄청난 고가 선물이었다. 그 외에도 6만~13만원대였던 TV와, 2만~3만원대였던 여성화장품과 스타킹 등이 초특급 VIP를 위해 준비된 특별한 선물이었다.
80년대는 10만~20만원대의 정육세트와 과일바구니가 고급선물로 꼽혔다. 특히 바나나는 단일 상품으로 5만원까지 판매돼 가장 비싼 과일에 속했다. 동아백화점에서는 85년 루비와 다이아몬드, 18K로 구성된 300만원짜리 루비세트와 116만원의 중국산 녹용을 내놓기도 했다.
90년대 초반에는 71만5천원의 컴퓨터가 명절 카탈로그에 이름을 올렸고, 80만~100만원대의 휴대전화가 명절 선물용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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