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문지방에 걸터앉지 마라

입력 2010-01-26 08:22:12

아주 어릴 적에 어른들로부터 여러 가지 생활 지혜를 듣고 배웠다. 그 가운데 '문지방에 걸터앉지 마라. 엉덩이에 뿔난다'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어린 생각에 '정말 그럴까?'하고 의심이 들었다. 나중에 커오면서 나름대로 해석하기로는, '어른이 방안에 앉아 계시는데 어린 것이 방과 마루보다 높은 위치의 문지방에 걸터앉아 있는 것은 건방진 모습으로 비쳐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방안에 들어와 앉든지 그렇지 않으면 마루에 앉아야 점잖아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생각하였다. 아무튼 어정쩡하게 남보다 높은 위치에 앉아 있는 것은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니기에 그러한 훈계를 하신 것이라고 짐작한다.

물론 이런 훈계의 이면에는 세상사에 대한 중립적 입장을 배제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할 것이다. 오히려 중용을 큰 미덕으로 삼은 것이 우리 조상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 갈등의 밑바탕에는 '이것 아니면 저것,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자리를 잡고 있다. 최근 일련의 법원 판결에 대한 검찰의 반발과 시민단체의 분열상은 법치주의 근간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 있다는 인상마저 주지 않는가. 그렇기에 양립된 입장 가운데 어느 한 편만을 고수하거나 두둔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시 문제에 관해선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이 하는 태도를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사안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세종시를 둘러싼 논쟁은 높은 양반들에겐 효율과 신뢰라는 정책가치의 선택 문제일는지 모르나, 연기군민들과 우리 지역민들한테는 생계가 걸린 사활의 문제라는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실로 세종시 수정안이 일으킨 풍파는 우리 대구경북 지역에는 폭풍으로 다가오는 현실임을 부인할 길 없다. 중앙정부로부터 세종시와 동일한 혜택만을 챙기면 혁신도시나 경제자유구역, 첨단의료복합단지 따위가 경쟁력을 갖출 성싶지만, 기업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판단해 보면 서울 본사 및 인천공항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을 선호하리라는 점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시장의 원리는 결코 시혜적이거나 동정적이지 않다. 그래서 국가지원과 정부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우리 지역민은 착각하지 않을 줄 안다.

이처럼 오지도 않을 기업들에 대한 미련을 오랫동안 가져서도 곤란하지만, 지금 우리 지역에 남아있는 우량 기업뿐만 아니라 우수 인재마저 앞으로 빼앗길 판이다. 세종시가 과학도시나 기업도시로 조성된다면, 그곳에 들어갈 새로운 인재들은 수도권이나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로만 채워질까. 전혀 아닐 것이다.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의견조사에서 광주광역시의 모 기관 종사자들 사이에 찬성자가 더 많았는데, 그 찬성 이유가 자신들이 수도권으로 옮겨갈 가능성이 더 많이 열릴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인 가운데 한 분이 7년 전쯤 수도권 대학으로 옮겼다. 그 당시 은행 빚내 아파트 한 채를 5억원가량에 분양받았는데, 작년 하반기 시가로 20억원에 이른다고 하였다. 수도권에 입주함으로써 거의 자동적으로 얻게 된 경제적 프리미엄이 그 정도이다. 이런 프리미엄을 얻을 기회가 있다면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세종시 수정안에 따르면 수도권 과밀화 해소는커녕 국가균형발전도 공염불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기업도시, 과학도시, 교육도시로서의 세종시는 우량 기업과 우수 인재를 빨아들일 블랙홀이 될 수 있는 만큼 우리 지역은 그나마 있는 기업과 인재마저 잃을 공산이 큰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동안 줄기차게 수립해온 우리 대구경북 지역 발전의 비전은 헛된 꿈에 지나지 않고, 신성장동력산업 육성 등 지식기반경제 사회를 맞이하여 추진해온 갖가지 지역정책 사업들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지역실정을 대변하고 실익을 챙겨야 하는 국회의원과 단체장들은 세종시 문제에 대한 명백한 입장을 밝히고, 곧 다가오는 선거에서 주민의 판정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세종시 문제의 해결은 결국 우리 유권자의 몫이다. 진정 다수의 힘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지역을 살리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다.

문지방에 걸터앉는다고 엉덩이에 뿔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험대에 오른 세종시의 문턱을 넘나드는 지역 정치인들에 대해선 유권자가 뿔날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싶다.

김규원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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