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낙동강 역사·문화 간직한 내륙 최대의 포구
드디어 낙동강과 백두대간의 탐사 종착지인 고령에 다다랐다.
고령은 고대 여러 가야국 중 가장 강성했던 대가야의 수도다. 대가야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고이 간직한 고령은 또한 낙동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대가야는 낙동강(고령 구간 55㎞)이라는 젖줄이 있었기에 오랜 기간 융성한 것이다. 고령은 왜관과 함께 낙동강 중류의 중심 고장이었다. 고령의 낙동강은 사람과 물류가 모이고 흩어졌고, 역사의 주인공으로 오랜 기간 우리의 삶과 함께해 왔으리라.
일행은 개진면 개포리의 낙동강 제방에 올랐다. 그 유명한 개포나루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쌓은 높은 제방이 나루를 대신하고 있지만 개포나루는 인근 다산의 사문진과 함께 낙동강 물류에 큰 획을 그은 곳이다.
*고려구국의 혼 '대장경'지킨 나루
개포나루는 그 뿌리부터 알아야 했다. 옛날 개포를 '개산포'(開山浦)라 불렀다. 개산이란 이름은 지금도 인근에 열뫼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옛날 개진에 부임한 한 원님이 개산포라는 지명을 듣고 "이름이 좋지 않으니 마을 이름을 고쳐야겠다"고 말하고는 "팔만대장경이 이 포구에서 내려 합천 해인사로 운반됐으니 뫼산(山)자 대신 글경(經)자를 넣어 개경포(開經浦)라고 하라"고 해 이후 개산포를 개경포로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왜인(일본인)들이 글경(經)자는 조선의 사상으로, 이를 격하시킬 의도로 아예 경자를 빼버리고 개포로 다시 고쳐버렸다. 불행하게도 개포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비록 행정지명 등에 여전히 개포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지만 고령군을 중심으로 개경포라는 '우리 이름 다시 쓰기' 움직임이 있어 참 다행한 일이다.
개경포는 고려 때 팔만대장경이 거쳐 간 곳이다. 팔만대장경은 몽고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 점등사에거 해인사로 옮겨야 했다.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배에 싣고 서해안을 거쳐 김해에서 다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개경포에 당도했다. 해인사 가는 길은 개경포가 가장 가까웠다. 영남의 승려들은 모두 모여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해인사로 향했고, 그 줄은 끝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개경포는 고려구국의 혼을 지킨 나루가 아니겠는가.
개경포는 조선에 와선 낙동강을 대표하는 포구로 자리 잡아 소금배와 세곡선이 수없이 드나들었다. 개경포가 한창 번창할 때는 세곡선과 소금배, 잡동사니를 실은 배들이 넓은 나루에 두 겹으로 정박했고, 몰려드는 물류를 저장하기 위해 나루 인근에는 창망(倉望)이라는 큰 창고도 있었다. 지금도 창망이 있던 자리 인근의 들판을 창야(倉野)로 부르고 있다.
남해안에서 올라온 소금과 생선은 합천과 거창, 성주, 김천 일대로 흩어졌고, 다시 이들 내륙지방에서 생산된 곡물은 개경포에 집산됐다. 개경포에 얼마나 많은 사람과 물류가 모였을까?
도적떼들은 개경포를 최고의 사냥감으로 지목해 노략질을 일삼았고 이에 맞서 상인들은 조를 편성해 창고 주변 순찰을 돌았다고 한다. 방범비는 상인들이 갹출했는데, 하루에 소금 한 가마 기준 엽전 한닢이었다. 하루 평균 모인 방범비는 평균 16냥 3돈 정도. 1냥은 100닢, 1돈은 10닢이니, 개경포가 한창 번창할 때는 소금만 1천630가마가 들어왔다는 얘기다.
개경포 주변엔 객주만도 30여개에 달해 객주에서 나오는 장구소리와 노래가 밤낮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개경포엔 시인묵객들의 낭만도 흘렀으리라. 조선 선조 때 개경포는 낙강칠현(洛江七賢)의 뱃놀이터였다. 낙강칠현은 낙동강변의 일곱 현인을 말하는데 송암 김면, 옥산 이기춘, 청휘당 이승, 육일헌 이홍량, 한강 정구, 대암 박성, 낙빈 이홍우를 일컫는다. 이들 일곱 영남 대유(大儒)들은 개경포의 맑은 물 위에 배를 띄운 뒤 술잔을 기울이며 수많은 시를 남겼다.
'강호여, 어쩌다가 제현들을 만났던고 유하주 기울이니 흥취 또한 고상하다. 넘치게 얻었으니 무엇을 더 구하리오 이날에 함께 즐기니 이것만이 원이었지. 파란강 푸른 물결 그 몇 굽이더냐 물구름 깊은 이곳 신비경이 아니던가. 강물 위에 노는 심경 고요하다 이를쏜가 고기잡이 뜻을 두면 한가롭지 않으리라. 아침에는 연꽃을 같이 보았고 저녁에는 금산사에 같이 쉬었네. 고상한 모임이라 우리 모두 칠현이니 쪽배에 몸을 실어 만경창파 달려보네.'
낙강칠현은 10대 소년 시절부터 40여년 오랜 세월 동안 서로 공경하며 깊은 정을 나눠 낙동강 유역의 칠현으로 지금까지 추앙받고 있다.
*영남 大儒 '낙강칠현'의 뱃놀이터
개경포와의 조우를 뒤로하고 고령 다산과 대구 화원의 경계인 사문진으로 향했다. 사문진(沙門津)은 낙동강의 모래를 걸어가 배를 탄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마을 이름도 바로 나루에서 유래해 사문이라 했다.
내륙지방이라 특별히 피서갈 만한 곳이 없었던 대구 사람들은 여름철이면 사문진 근처 모래사장에서 모래찜질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사문진은 낙동강을 따라 올라온 물산(物産)들이 유입되는 요충지였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돛단배나 범선이 수없이 드나들어 대소비지인 대구에 수많은 물품을 실어나른 곳이 사문진이다. 사문진은 또한 한때 조선의 '대일무역센터'였다.
*水運통한 공·사무역의 요충지
조선 성종 때 관청과 민간에서 사용하는 일본 상품을 보관하기 위해 사문진에 '왜물고'(倭物庫)라는 창고가 설치됐다. 조선의 대일무역은 사신 왕래 등을 통해 행해지는 공(公)무역과 상인들끼리 직접 거래하는 사(私)무역이 있었다. 당시 사무역은 외국 상품의 필요 이상 유입과 금, 은, 인삼 등의 지나친 유출, 국내 정보 누설, 상인간 충돌 등의 폐단이 도를 넘자 조정은 사무역을 전면 금지하고 공무역만 허용했다. 공무역으로 인한 막대한 물량을 수송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고, 조정은 서울과 부산의 교통 요충지인 사문진에 왜물고를 설치한 것이다.
남해안을 통해 들어온 일본 상품은 모두 국비로 매입, 나룻배에 싣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7, 8일 만에 사문진에 도착, 왜물고에 보관됐다. 보관된 물품의 일부는 서울의 왕실 관아에 보내고, 나머지는 국내 상인에게 매매했다. 사문진은 왜물고 설치 이후 공무역의 폐단으로 인해 사무역이 다시 부활하기까지 10년 가까이 일본 상품이 보관되고 유통된 조선 유일의 나루라는 명성을 얻은 것이다.
이후 사문진은 공무역 기능을 남해안의 포구 도시들에게 빼앗겼지만 대구라는 경제적 배후를 둬 낙동강 대표 나루의 명성을 이어갔다. 1940년대 초 한 기록에 의하면 사문진을 통해 대구에 집산된 물자는 쌀 20만섬, 콩 10만섬, 우피 40만근, 소금 10만섬, 석유 3만5천상자, 성냥 6천상자, 옥양목 6만단, 무명 10만단 등으로 적고 있다. 또한 상당량의 잡곡과 약재, 잡화, 견·면직류 등이 사문진을 통해 나갔다.
*조선대표 상단 '고령상무사' 배출
사문진 물산의 5분의 2는 대구시장에서 소비됐고, 나머지 5분의 3 정도는 대구를 중개지로 해 전라, 충청, 강원 등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고 한다.
수운이 사라지고 육운과 해운이 자리 잡은 지금 사문진의 모래사장과 나루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1993년 2척의 도선을 끝으로 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사문진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숨어버렸다. 그럼에도 사문진의 옛 영광만은 역사 속에 당당히 잡아 후손들에게 영원히 이어지고 있다.
55㎞의 고령 낙동강에는 개경포와 사문진 외에도 다산의 논실·강정·바리미·노강진, 성산의 무계·도진·오실, 개진의 진두·물문·오사, 우곡의 도진·부례·답곡·대바우·객기 등 15개의 나루가 더 존재했다.
고령은 옛적부터 배를 만들어 낙동강에 띄웠다고 한다. 내륙에 위치한 고장치곤 매우 드문 경우다. 고령읍 고아리 일대의 '배울' '뱃골' '주곡'(舟谷) 등의 지명이 대가야 때부터 배를 건조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강에는 나루가 있고, 나루엔 시장이 형제처럼 따라 다닌다. 시장에는 물건을 파는 자와 사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조선의 시장에는 행상을 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거래를 주선했던 상인이 있었다. 바로 보부상이다. 17개의 나루를 가진 고령은 수많은 물산이 오갔기에 전국적인 상단이 있었다. 고령의 낙동강은 '고령상무사'라는 조선의 대표 상단을 배출한 것이다.
조선의 보부상은 19세기 말 명실상부 전국적인 조직을 갖췄다. 보부상 간 결속력이 다져졌고, 큰 규모의 상권을 형성했다. 고령상무사는 1899년 설립, 고령장을 중심으로 고령 기와와 고령 도자기, 해산물 등을 조선 전역에 유통시켰다. 고령상무사는 경북에서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남은 조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 고령읍 고아리에 기념관이 건립돼 국내 몇 안 되는 보부상의 역사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고령은 지금 낙동강의 물길을 다시 열고 있다. 개경포에 나루터와 포구를 다시 조성하고,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의 옛 뱃길도 재현할 계획이다. 해인사와 연계해 고령 일대를 한국 불교성지 순례지역으로 만드는 소식도 들린다. 또 낙동강 고령지역 55㎞에 분포하고 있는 나루터와 정자, 명현들의 발자취 등을 둘러보는 낙동강 역사·문화탐방 코스도 만들고 낙동강 생태로드, 고령 도예마을, 낙동강변 레포츠단지 청사진도 나오고 있다.
대가야의 수도와 낙동강의 중심 고장이라는 '행복한' 역사·문화자산을 갖고 있는 고령. 분명 그 미래도 활짝 열리지 않을까.
이종규기자
고령·최재수기자
사진·정운철기자
자문단:고령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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