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슬기에 부추만 쑹덩쑹덩 단순 소박이 맛과 멋의 원형
초등학교 육 년 동안 두 명의 사기꾼 친구를 만났다. 첫째는 이 학년 때, 둘째는 오 학년 때로 기억된다. 그들의 말솜씨와 사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그들을 만난 자체가 아련한 환영이 아닌가 할 정도다.
무료한 시간이 찾아오면 기억과 추억이란 화두를 들고 서성일 때가 더러 있다. 기억은 전부 추억할 수는 없지만 추억은 모두 기억할 수 있다. 내가 만난 초등학교 때 모든 친구들이 기억 속의 사람들이라면 이 두 친구는 분명 잊지 못할 추억의 사람들이다. 한 편의 영화가 스쳐간 기억이라면 잊혀지지 않는 라스트 신은 또렷한 추억이다.
기억은 명사지만 추억은 동사다. 기억은 단순하게 '과거에 있었던 일'을 지칭하지만 추억은 '그 속에서 놀던 때'를 말하는 것으로 다분히 행위적이다. 그래서 추억은 스틸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이다.
##"은박지가 녹으면 은이 된대"
첫 사기꾼 이야기. 우린 그때 딱지치기를 하며 놀았다. 딱지는 두터운 종이로 만들어야 잘 뒤집어지지 않았다. 미술책을 뜯어 딱지를 만들었던 극팔이란 친구는 다른 동네 아이들에게 몽땅 까 잃고는 내게 접근해 왔다. 담뱃갑 은박지를 작은 구슬처럼 만들어 "이걸 세 시간만 햇볕에 녹이면 은이 되는데 미술책과 바꾸자"고 제의했다.
그게 녹아서 은이 된다면 미술책 열 권은 능히 살 것 같아 별로 의심하지 않고 바꿔주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은박지가 은으로 녹아내리기를 기다렸으나 태양은 무심했다. 다음날은 햇볕이 잘 드는 짚동 사이에 놓아두고 학교에 다녀오니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가는 바람에 녹다가 그만둔 것 같았다. 한 달 내내 은박지를 들고 씨름을 했으나 태양은 정말 냉정했다.
기억이란 필름에는 세월이 빚어 낸 '망각'이란 먼지들이 끼게 마련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닳고 낡아 기억이 추억으로 재생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회상단서(retrieval)라고 부르는 기억의 흔적(engram)을 자주 자극하면 기억 속의 보석들이 추억으로 건져 올려진다고 한다. 은박지 친구도 내가 지금 신문에 쓰고 있는 연재물인 '고향의 맛'이란 단서에서 찾아낸 보석임이 분명하다.
##"다슬기 잡아주면 오디 실컷 먹여줄게"
두 번째 이야기. 욱성이란 아이가 있었다. 그는 더 지능적이었다. 아마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보이스 피싱(voice phishing) 또는 보험 사기단의 CEO쯤 되었을 것이다.
여름 토요일 오후. "사고디(다슬기)를 좀 잡아주면 친척 아저씨네 뽕밭에 가서 오디를 실컷 먹도록 해 주겠다"고 유혹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무료한 시간을 강에서 보내고 나면 탐스럽게 생긴 오디 열매를 신나게 먹게 되겠거니'라고 생각하니 무척 즐거웠다. 그건 마치 "우체국입니다. 귀하에게 소포가 왔으니"란 전화를 받고 사기꾼이 지정한 장소로 달려 나가는 순덕이 아줌마와 같은 심정이었다.
오후 내내 다슬기를 잡아 친구의 주머니에 가득 채워 준 후 뽕밭으로 갔다. 그 밭은 친구의 친척집 밭이 아니었다. 철조망 사이를 뚫고 들어가야 하는 오디 서리의 현장이었다.
친구는 우리 몇몇만 들여보내 놓고 자신은 강둑 위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 주인이 "야, 이놈들"하고 고함치는 바람에 따놓은 오디도 챙기지 못하고 개구멍으로 빠져나와 도망치기에 바빴다.
나는 다슬기 국을 좋아한다. 다슬기를 끓여낸 파란 물에 탱자나무 가시로 빼낸 다슬기 알맹이와 '정구지'(부추)만 쑹덩쑹덩 썰어 넣고 다진 마늘과 굵은 소금으로 간을 맞춘 담백한 국을 좋아한다. 여기에 배추와 대파는 물론 들깨 즙을 풀어 넣는 것조차 싫어한다. 단순 소박이 맛과 멋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요즘도 다슬기 국을 먹거나 담뱃갑 속의 은박지만 봐도 유년에 만났던 아름다운 사기꾼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을 만나 은박지를 녹이면서 다슬기 국이나 한 그릇 먹어 봤으면.
수필가 9hwal@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