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상흔 고이 간직… 순국선열 넋 기려
칠곡에 가면 다른 지방에선 보기 드문 '특별한 존재'들이 몰려 있다. 기념관과 비석, 탑 등이다. 특별한 존재인 것은 모두 6'25전쟁 상징물들이기 때문이다.
칠곡은 호국(護國)의 고장이다. 물류의 중심 도시와 함께 칠곡을 가장 대표하면서 칠곡의 정신으로 귀결되는 것이 호국이다.
우린 칠곡 호국의 대표 상징물이자 6'25전쟁의 상처를 고이 간직한 낙동강 구철교로 향했다. 칠곡 호국의 정신을 되짚기 위해서.
왜관읍 왜관리의 낙동강을 가로지르고 있는 구철교는 지금은 이름난 관광명물이다. 철교에 조명까지 달아 야간에는 낙동강 물과 어우러져 꽤 괜찮은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6'25전쟁의 상흔만은 옛 그대로였다. 호국의 정신을 잇기 위한 듯 철교의 일부가 여전히 끊겨 있었다.
'호국의 다리'로 명명된 철교, 60년 전 당시 이 철교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950년 8월 1일로 시계를 되돌렸다.
대구와 부산이 함락 위기에 놓였던 8월 1일,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결코 뚫려서는 안 되는 생명선이었기에.
이 방어선의 중심지가 바로 철교를 중심으로 한 왜관이었다. 이틀 뒤 왜관의 전 주민에게 소개령(疎開令)이 내려졌고, 낙동강 방어선의 교량들은 적의 도하 방지를 위해 4일 새벽까지 모두 폭파됐다. 이 때 왜관의 철교(6'25전쟁 당시는 사람과 차가 다닌 인도교였다)도 폭파됐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왜관~현풍까지의 40km 구간을 담당하던 미국 제 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은 휘하 부대가 김천에서 왜관으로 철수를 완료하면 작전상 한강의 다리와 버금가는 왜관의 낙동강 인도교를 폭파키로 했다.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유일한 방책이 바로 인도교 허리를 끊는 일이었다. 이 때를 즈음해 낙동강 변에는 김천~대구간 유일한 통로인 인도교를 통해 수십만의 피란민과 군인들이 붐볐다.
피란민들이 길을 메우는 바람에 국군과 유엔군의 작전에 큰 장애가 됐고, 특히 북한 게릴라군들이 피란 대열에 끼여 강을 건너와 아군의 작전에 적잖은 피해까지 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적 게릴라의 침투를 막기 위해 낙동강으로부터 8km 이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모두 정든 고향 땅을 떠나야 했다.
당시 인도교는 피란민들의 아수라장이었고, 이내 아비규환의 절규가 낙동강에 토해졌다. 인도교 폭파에 앞서 유엔군은 수만의 피란민들이 인도교를 건너 아군의 작전지역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피란민들은 강을 건너, 때론 국군과 유엔군의 도강 행렬에 휩쓸려 생명줄을 이어가려 했다. 폭파 시기 판단은 게이 소장의 생애 중 가장 힘든 결단이었지 않았을까. 자신의 판단에 따라 수천, 수만의 목숨을 살리고 죽이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3일 오후 8시 30분, 굉음과 함께 인도교가 폭파됐고, 어둠이 짙어진 밤하늘에는 서글픈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총길이 469m 중 왜관쪽 둘째 경간 63m가 끊어졌다. 미처 인도교를 건너지 못한 피란민들은 뒤에서 적이 몰려들자 코너에 몰린 쥐마냥 너도 나도 강으로 뛰어들었고, 강을 건너지 못해 떠내려간 아이와 부녀자, 노인 등은 그 수조차 헤아리기 어려웠다.
인도교 폭파 후 미국 기병사단은 강 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의 전차 도하를 저지해 나갔다. 이윽고 8월 16일에는 미국 B29 전투기 98대가 강 건너 북한군 진영에 26분 동안 90t의 폭탄을 투하해 북한군 4만명 중 3만여명이 전사했다. 1초에 20명, 1분에 1천150명이 폭사한 것이다. 26분, 90t의 융단폭격작전은 세계전쟁사에 기록될 만큼 아군에겐 위대한 승리를 안겨줬지만 수많은 피란민들의 희생과 북한군의 죽음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도 남겼다.
이처럼 왜관은 대구 사수, 나아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최대의 전략 요충지였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불과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 지역을 뺀 나머지는 모두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이때 유엔군총사령관인 미국의 워커 중장은 대구 사수와 부산 교두보 확보를 위해 마지막 저지선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택했다. 일명 '워커 라인'이다.
왜관에서 경남 남지에 이르는 낙동강 본류는 지형적으로 방어에 유리했다. 낙동강은 강폭이 크게는 1km에 달했고, 수심도 1m는 족히 넘었다. 또한 낙동강의 동서 양안은 절벽과 산이 많은 반면 언덕이나 평지가 별로 없어 적의 도하도 어려워 국군과 유엔군에게 절대 유리한 천혜의 방어요새였던 셈이다.
동해안 영덕에서 경남 남지에 이르는 '「' 모양의 낙동강 방어선의 꼭짓점이 바로 칠곡 왜관이었으니 그 만큼 6'25전쟁의 운명을 손에 쥐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후 국군과 유엔군, 북한군간 뺏고 뺏기는 전쟁이 수없이 반복됐고, 6'25전쟁사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들이 바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벌어졌다.
일행은 낙동강 구철교에서 잠시 고개를 숙인 뒤 6'25전쟁 최대격전지 중 한 곳인 가산면 다부리로 향했다. 중앙고속도로 다부IC에서 동쪽 아래로 다부동고개가 시작되는 입구 지점에는 25m 높이의 기념비와 탱크 모양의 전적기념관이 있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이웃 유학산을 바라보며 서 있다. 이 건물은 다부동전투의 승리와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81년 세워졌다. 다부동전투 참가자들로 구성된 다부동전투 구국용사회는 당시 전투가 가장 격렬했던 8월을 기념해 매년 8월 25일 기념관에 모여 옛 전우의 넋을 기리는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다부동과 이웃 유학산 일대는 6'25전쟁 당시 얼마나 치열했을까? 우린 궁금증을 풀기 위해 6'25전쟁 이전의 다부동 흔적부터 찾기로 했다.
팔공산이 서쪽으로 숨가쁘게 내달리다 가산과 오계산 봉우리의 허리가 휠때쯤 주저앉은 곳이 다부동고개이다. 다부동은 팔공산이 서쪽으로 내달리며 빚은 황학산과 유학산, 소학산의 틈새에 조용히 앉아 있다.
다부동은 숙명적으로 격전지, 요충지 일 수밖에 없었다. 신라와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축성된 인근의 천생산성(구미 인동), 가산산성(칠곡 동명), 냉산산성(구미 도리사 뒷산)이 다부동고개의 험난한 역사를 설명해 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달구벌(대구)과 문경새재를 잇는 유일한 통로, 일찍이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대권의 길목에서 혈투를 벌인 곳 중 한 곳이 바로 다부동고개였다. 조선으로 넘어와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이 치열하게 펼쳐졌던 곳이기도 했다.
다부동의 역사는 6'25전쟁에서 그 정점을 이룬다. 303고지(자고산)~328고지(석적읍 포남리)~숲데미산(석적읍 망정리)~유학산(석적읍 성곡리와 가산면 학산리 일대)을 잇는 방어선이 바로 다부동전투다. 특히 유학산은 9번, 328고지는 무려 15번 고지주인이 바뀔 만큼 치열했다. 유학산은 다부동을 병풍처럼 감싸안고 낙동강 동안에 펼쳐 놓은 돌산이다. 839m 유학산 정상은 북한군 포병이 대구시를 공격할 수 있는 요새였다. 만약 유학산이 점령돼 북한군이 대구시를 포로 공략했다면 국군과 유엔군의 대구 사수는 물거품이 됐을 것이고, 급기야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져 부산의 운명도 가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학산 정상을 탈환하기 위해 예고된 죽음의 혈전이 8월 한 달을 붉게 물들였다. 8월 18일부터 25일까지 8일간 9차례 탈환전 중 아군 측 보충병력이 하루 700명에 달할 정도로 희생이 컸다. 당시 후방에서 신임 소위가 보충돼 오면 유학산 정상의 소대까지 올라가는 것이 문제였다니 말이다.
다부동전투는 9월 24일 천생산 진지를 탈환할 때까지 55일간이나 계속됐으며 북한군 2만4천여명과 국군 1만여명이 죽거나 다치는 참상을 빚었다. 특히 다부동전투에서는 최초의 한미연합작전으로 북한군과의 전차전이 벌어졌는데, 전쟁사에 '볼링앨리전투'로 기록됐다. 볼링앨리는 포탄이 날아가 후방에서 폭발하는 상황이 마치 볼링공으로 핀을 넘어 뜨릴 때의 모양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받아들이는 의미의 차이겠지만 그리 달갑지않은 전투 이름이라는 생각만 머리에 남는다.
다부동전투는 당시 투입된 북한군 3개사단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겼고, 특히 북한군 13사단을 아예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한국군의 다부동전투 승리는 6'25전쟁의 운명을 뒤바꾸는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전쟁에선 죽여야, 그리고 승리해야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겐 동족상잔의 비극이요, 참회의 장으로 남겨졌다.
1994년 이후 세차례의 유학산 일대 발굴작업에서 수많은 유골과 전쟁유품이 발견됐다. 수습된 유골들은 다부동전적기념관 입구 오른쪽 양지바른 곳에 안장됐고, 대통령 휘호가 새겨진 구국용사충혼비가 세워졌다.
칠곡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호국의 도시다. 매년 여름이 되면 찾는 이들의 가슴을 숙연케 한다.
칠곡에는 지금 12곳의 기념관과 탑, 비석에 호국영령들의 넋과 피란민들의 혼이 서려 있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왜관지구전적기념관(석적읍 중지리), 낙동강 구철교, 다부동전승비(가산면 금화리), 백선엽장군전적비(동명초등학교 내), 백선엽장군호국구민비(다부동전적기념관 내), 왜관지구전적비(석적읍 중지리), 왜관지구전승비(왜관읍), 순국경찰위령비(왜관읍), 구국경찰충혼비(가산면 다부리), 구국용사충혼비(다부동전적기념관 내), 충혼탑(왜관읍) 등이다. 한 번 쯤은 찾아 순국선열의 뜻을 기리는 것은 어떨까.
이종규기자 칠곡·조향래기자 사진 정운철기자
자문단 장영복 칠곡문화원장 김종삼 칠곡군 공보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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