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토 '100년만의 만남']<11·끝>가상 대담

입력 2009-10-24 09:00:00

安 "독립운동일 뿐…원한 없어" 이토 "동양평화 해친 주범…억울"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 가묘(假墓). 백범 김구 선생이 1946년 유해 봉환을 고려해 삼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묘 옆에 만든 것이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 가묘(假墓). 백범 김구 선생이 1946년 유해 봉환을 고려해 삼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묘 옆에 만든 것이다.
일본 도쿄 시나가와구(品川區)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 묘소. 3천630㎡(1천100평)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크고 봉분이 호화롭다. 26일 이곳에서 이토 사망 100주년을 맞아 큰 규모의 추도식이 열린다.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일본 도쿄 시나가와구(品川區)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 묘소. 3천630㎡(1천100평)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크고 봉분이 호화롭다. 26일 이곳에서 이토 사망 100주년을 맞아 큰 규모의 추도식이 열린다. 사진: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두 사람이 오늘 마주앉았다. 둘의 관계는 100년 전에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형이다.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 양 국민의 인식차이는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토론에서 '과거는 현재의 창(窓)'이라는 역사의 엄밀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사회: 두 사람이 자리를 함께한 것은 처음이다. 100년 전을 돌이켜 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안중근: 그때는 국권을 강탈한 늙은 도적을 처단하겠다는 각오뿐이어서 총을 쏘면서도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다. 독립운동을 위해서였지, 원래부터 이토공을 알지 못했는데 사사롭게 원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토: 나를 쏜 범인이 한국인이란 말에 '바보 같은 놈'이라고 했지만 만나 보니 기백 있는 청년인 것 같다. 나도 대의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무사출신인 만큼 호감 가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 과거사 문제부터 짚어보자. 이토공이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했는데 적법한 조약이라고 생각하는가.

▶안중근: 조약은 원천 무효다. 군대를 동원해 협박하고 대한제국 황제의 옥새를 훔쳐 맺은 조약이다. 만국공법(萬國公法)에도 어긋난다. 이웃나라로서, 같은 아시아민족으로서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나라를 빼앗는 것은 강도짓이다.

▶이토: 적법한 절차를 밟은 조약이다. 한국정부 대신들의 다수가 서명 날인했고 황제에게 재가를 받았다. 고종이 마지막에 희망한 '한국이 부강하게 되어 독립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때는 이 협약을 철회한다'는 조문까지 반영돼 있다.

▶안중근: (목소리를 높이며) 조약을 강제로 맺었다는 것도 종이 위에 적힌 빈 문서일 뿐이다. 한 지아비의 마음도 뺏지 못한다고 했거늘, 하물며 2천만의 정신을 어떻게 빼앗을 수 있었겠느냐.

▶이토: 한국인은 3천, 4천년 이래 고유의 독립을 확보하고 있는 듯이 말하지만 나는 인정할 수 없다. 일본은 될 수 있는 대로 한국이 독립하기를 바라왔지만 한국은 끝내 독립할 능력이 없었다. 일·청, 일·러 전쟁을 했고 그결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일본의 자위상(自衛上) 어쩔수 없는 조치였다.

-사회: 내년이면 한일병합 100주년을 맞는데 이를 놓고도 양국에서 시각이 다른 것 같은데…

▶이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예전에 일본은 한국에 문명을 전도하려고 했다. 한국인은 자립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그럭저럭 살아가려는 심리가 있었다. 한국의 군사 및 경찰제도, 교육, 행정, 공업, 재판제도는 한마디로 혼란과 무능 그 자체였다. 시대에 뒤떨어진 행동으로 배꼽을 잡게 하는 유생(儒生)뿐이고 제대로 된 인물도 없었다. 나는 한국을 문명국으로 만들기 위해 진력했는데 식민지 시대에도 어느 정도 일관된 방향으로 진행된 것 같다. 오늘날 한국이 번영을 이룬 데는 일본 역할이 컸다.

▶안중근: 아직도 일본인은 도둑놈 심보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은 외국에서 써오던 수법을 흉내내 약한 나라를 병탄했다. 이런 생각으로는 패권을 잡지 못하고 독부(獨夫·악행을 일삼아 따돌림을 받는 사람)가 될 것이 분명했다. 일본의 성질이 급해서 빨리 망하는 결함이 있는데 결국 태평양전쟁에 패하지 않았는가. 일본인들이 아직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일본을 위해서도 애석한 일이다.

-사회: 두 분의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이 많은데 안 의사가 쓴 유명한 책 '동양평화론'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

▶안중근: (힘찬 표정으로) 집필 당시와 현재와는 환경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유효한 제안이다. 당시 서양제국주의와 일본의 침략주의를 억제하는 틀로 한중일 삼국연대가 필요했고 여순을 중립화해 동양평화회의 본부를 그곳에 둘 것을 제안한 것이다. 분쟁의 축을 협력의 축으로 바꾸는 모델이다. 오늘날의 유럽연합(EU)과 같은 형태다. 동양평화를 위해 이를 가로막는 이토공을 사살한 것이다.

▶이토: 삼국연대는 원칙적으로 찬성이다. 이웃끼리 뭉쳐야 한다. 삼국 간에 좀더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야 한다.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나는 문관출신으로 한번도 전쟁을 찬성한 적이 없다. 한반도와 만주에서 일본의 이익을 어떻게 지켜갈지 고민했을 뿐이다. 나를 동양평화를 해치는 주범으로 모는 것은 억울하다.

-사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얘기로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앞으로 한일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나.

▶이토: 우리 둘의 관계를 한일 간에 가까워지는 징검다리로 이용하면 좋겠다. 쏘고 죽었다는 과거 역사가 중요한 게 아니다. 두 사람에 대한 양국 간 공동연구, 세미나, 민간교류 등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길 바란다.

▶안중근: 서로 원한을 잊을 때가 됐다. 한국과 일본은 가장 우의있게 지낼 수 있는 나라다. 각자 나라에서 인정받는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동양평화를 위해 활용됐으면 한다.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망한다는 것은 만고의 이치다.

정리·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토론 상당 부분은 두 사람이 역사 기록과 자서전, 전기 등을 통해 밝혔던 내용을 주제에 맞춰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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