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직업] <3>극장간판 미술가…"왕년 스타들도 잘 그려달라고 눈치봐"

입력 2009-10-22 09:24:19

20일 대구 동성로 한일극장. 개봉 예정 영화의 실사 포스터가 빌딩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컴퓨터 작업을 거쳐 나온 만큼 정밀도가 높다.

시계 바늘을 15년 전쯤으로 돌려 기억을 더듬어본다. 사람의 손으로 직접 그린 아날로그 간판이 달려 있다. 총 천연색의 자연 물감. 왠지 모르게 어색하지만 배우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인다.

영화 홍보 수단이라고는 아날로그 간판이 유일하던 그때 그 시절, '극장 간판 미술가'들은 '귀하신 몸'이었다. 영화계를 호령했던 왕년의 스타들도 눈치를 봤을 정도. 극장 간판 미술가들의 붓놀림에 따라 간판 안에서 영화배우들의 모습이 천차만별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대구의 첫 극장 간판 미술가가 누구인지는 원로들이 세상을 떠난 지금 사실 확인이 쉽지 않다. 다만 1920년대 들어 대구에 처음 극장이 생긴 것으로 미뤄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자료에 따르면 '눈물 젖은 두만강'의 민경식 감독이 '만경관에서 간판을 그리다가 우연한 기회에 무대에 선 것'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민 감독은 1969년 말까지 영화간판 작업을 계속했다.

극장 간판 미술가는 한때 선망의 직업이었다. 아침마다 젊은 지망생들이 극장 간판에 붓질을 배우기 위해 줄을 서던 시절이 있었다. 수입도 대졸 신입사원보다 훨씬 더 좋았다.

현재 영화 배급일을 하고 있는 용병식(57)씨도 영화간판을 그렸다. 1969년 무렵부터 2002년 제일극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간판 작업을 했다.

영화간판 작업은 철저히 도제식이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수성물감과 아교 등을 물에 섞은 '안료' 만드는 것부터 모든 것을 곁눈질로 배웠다. 박봉에 단지 '그림 배운다'는 생각만으로 꿋꿋이 버텼다. "10년쯤 눈으로 보고 손으로 익히고 나서야 겨우 그리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간판 제작법도 변했다. 커다란 종이에다 그림을 그려 간판에 바르던 것이 페인트로 직접 그리는 방식이 됐다. 용씨는 대구의 영화간판 제작법에 2가지 방식이 있다고 증언했다. 배우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부드럽게 그리는 민경식파, 거친 붓 터치로 강하게 표현하는 안경모파로 본인은 후자 양식이라고 했다. 그래서 "영화간판을 보면 누가 그렸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제작 시간은 가로 4m, 세로 2m 소극장용은 대략 3시간. 그러나 가로 16m, 세로 4m짜리 개봉관의 거대한 간판은 적어도 3일이 걸렸다. 이전 간판을 철거한 뒤 흰색 바탕칠을 하고 밑그림을 그린 뒤 덧칠을 하는 등 작업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 계속 서서 작업을 하며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르락하니 체력 소모도 엄청났다. 대표작이 바로 '쥐라기 공원'이다. 특히 명절 대목을 앞두고는 작업이 몰려 밤샘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어깨가 제대로 올라가지 않는 일도 허다했다. "이제는 하라고 해도 못하는 일"이라는 말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영화간판 미술가의 전성기는 1980년대 들어 소극장이 생겨날 때였다. 용씨는 당시 대구·경북을 오가며 10개의 극장에서 영화 간판을 제작했다. 한 달 수입이 200만원이 넘어 "돈을 가방에 넣어 다녔다"고 했다. 대구 시내에만 30여명의 영화간판 미술가가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몰락기가 찾아왔다. 만경관에서 대구 최초로 '실사 영화간판'을 내걸고, 대형 멀티플렉스가 영화시장을 장악하면서 실직자가 속출했다. '반지의 제왕'을 끝으로 영화간판 작업에서 손을 뗀 용씨는"실사 간판이 도입된 이후 짧은 기간에 쫓기듯이 보따리를 쌌다. 이젠 그 누구도 영화간판 일에 대해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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