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 체육학부 한준영 교수
"축구를 잘 할 때건 못 할 때건 언제나 차범근이라는 아버지 이름이 자신의 앞에 붙는 차두리 선수의 심정을 아십니까?"
영남대 생활과학대 건물 2층 맨 구석. 서향(西向)에 크기도 다른 방보다 작아 계절에 따라 무척이나 덥고 추울 것 같은 연구실. 운동선수 못지않은 덩치에 서글서글한 웃음이 인상적인 체육학부 한준영(35) 교수를 12일 만났다.
"올초 정년퇴직한 아버지 한광걸 교수 후임으로 아들이 체육학부 교수가 됐고, 연구실도 물려받아 쓴다"는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찾아간 터였다. 모교 교수가 된 기쁨, 아버지의 자리를 이었다는 자부심, 신임 교수로서의 포부 같은 긍정적인 질문들을 떠올리며 인터뷰를 시작하려는데 그는 대뜸 얼굴을 굳히며 "인터뷰 의도를 말씀해 주세요"라고 물었다.
다소 공격적이었다. 예정했던 질문들을 한참이나 설명하자 그제서야 얼굴이 풀렸다. "요즘 좀 민감해서요. 제 임용을 안 좋게 보는 말들이 지금도 학교 안팎에 떠돌아 마음 편한 날이 많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버님의 곧았던 삶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칠까 걱정입니다."
이젠 소문에 일일이 해명하는 대신 성실한 수업과 연구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로 결심했다는 한 교수는 "그래도 모교가 좋고, 아버님이 계시던 데라서 더 좋다"고 했다.
부자(父子)는 지금까지 그리 가깝게 지내지 못했다. 아버지가 있는 영남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했지만 주위 눈길 때문에 줄곧 피해다녔고, 유학조차 영남대와 자매결연한 대학을 피해 갔을 정도였다.
하지만 부자의 실력은 누구나 인정하는 수준이다. 한광걸 교수는 강의도 수준급 이었지만 각종 실기 종목에도 뛰어났다. 등산에 특히 열정을 쏟아 세계에서 7번째로 높은 로체샤르(8천400m)를 아시아인 최초로 등정하기도 했다. 아들 역시 만능 스포츠맨으로 미국 코네티컷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곧장 버지니아주 래드포드 대학 교수로 임용돼 강의를 하다 올 3월 영남대로 옮겨왔다.
"아버님이 쓰시던 연구실은 안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체육학부에서 가장 신참이다 보니 구석지고 좁은 방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방에서 마지막 10년을 에어컨도 없이 보내셨다니 아버님께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아버지는 당초 아들의 체육교육과 지원을 강하게 반대했다. 탄광일까지 하며 고학한 후에도 삶이 순탄치 못했던 아버지는 운동은 절대 안 된다며 다른 분야를 종용했다. 아버지가 해외 원정 등산을 나간 사이에 원서를 내며 고집을 피운 아들은 입학 후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테니스를 가르치다가 자세가 조금이라도 틀리면 산에 올라가 1천번씩 연습을 하고 오라고 시키셨습니다. 그렇게 엄한 아버지셨지만 제자들과 있는 자리에서 우연히 '피가 무섭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조부님도 체육을 전공하셨다더군요."
그 자신도 뒤늦게 3대째 체육 교수 집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6·25 전쟁때 대구로 피란 내려오기 전 평양의 대학에서 체육과 교수를 했다고 한다. 교수 출신이지만 월남 후 자리를 잡지 못해 가족들의 생계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아버지 때문에 아들의 체육 전공을 그렇게 말렸던 것이다.
미국에서 스포츠 경영/사회 프로그램을 전공한 한 교수는 요즘 경영-체육 연계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통섭과 융합이라는 세계적 추세에 맞춰 흔히 스포츠경영이라고 불리는 분야를 체계적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다. 앞으로의 연구도 스포츠와 소수자 문제, 교육과 스포츠, 스포츠와 국제관계 등 스포츠를 사회문화적 영역으로 확산시키는 데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미래를 보고 연구하지만 과거도 중요합니다. 일본어는 전혀 모르지만 아버님이 보시던 일본어 교재, 교육기자재 등을 제 연구실에 보관해둔 이유입니다. 이렇게 자료들을 축적해 훗날 조그마한 스포츠 도서관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아버님의 명예를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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