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궐내에 남루한 초가를 지어 기거했다. 백성의 고초를 몸소 겪겠다는 것이었다. 궁중 호사에 길든 지체이고 온갖 질환을 달고 사는 병약한 몸이었다. 날마다 신료들이 초가 마당에 엎드려 대전으로 들 것을 간청해도 꿈쩍 않았다. 왕후의 읍소도 소용없었다. 백성에 섞이려는 세종 나름의 소통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모든 나랏일은 백성 제일주의에 근거해 결정하고 실행했다. 신료들에게도 어려운 백성을 헤아리는 데 정치의 근본을 둘 것을 당부했다. 왕조 권력을 통틀어 가장 친(親)서민적 임금이었다. 내일 서울 한복판에 세종 동상이 우뚝 선다. 560년이 지난 후대에서도 백성 사랑의 진심이 통하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온 사방에 '친서민' 도배를 하며 입만 떼면 '서민' '서민'이다. 주어진 임기를 '서민 정치'로 승부 걸겠다는 인상마저 준다. 일주일 전 기자회견서는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곧 '서민 프렌들리'라고까지 갖다 붙였다. 외곬이 느껴지는 주장이다. 그런 논법이라면 '친서민' 아닌 게 없을 것이다.
돌아보면 이 대통령이 이전이라고 서민을 등한시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번씩 시장통이나 '봉고차 모녀' 같은 그늘진 곳에 모습을 나타내고, 환경미화원 시장상인 노점상 택시기사 신문배달원 같은 사람들을 청와대로 불러 밥도 내고 선물도 쥐여주었다. 그 나름의 서민 친화적 행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큰둥했다. 어느 정권에나 있던 이벤트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부자 정권으로 몰린 나머지 생색을 내고 있다고 봤다. 대통령은 야속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청소부 출신 대통령의 순정을 알아줄 날이 올 것이라며 서운함을 눌렀을 것이다.
이 대통령이 정신 번쩍 든 것은 노 전 대통령 국민장에 몰린 500만 추모인파를 목도하고서이지 싶다. 전 정권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은 가슴 서늘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검찰 수사로 서민 대통령의 허구가 까밝혀진 뒤끝이었다. 도덕성은 만신창이가 났다. 국민의 실망과 분노가 비등한 터였다. 그런 마당인데도 막상 당사자에 변고가 생기자 자기들 초상처럼 애통해 하는 수백만은 이 대통령에게 불가해 그 자체였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전국 분향소 앞에 긴 줄을 세웠을까. 죽음 앞에 관대해지는 국민성으로만 이해할 수 있나. 대통령은 스스로 물으며 심란해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둘러봤을 것이다. 나는 누가 있나. 나중에 나도 저리 울어 줄 것인가. 영결식 날 밤늦도록 기울였다는 술잔에는 이런 심경이 담겨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 대통령의 머릿속은 서민에 꽂혔으리라 본다. 실적도 없이 입만 요란한 서민 대통령이었지만 정서만큼은 통했구나 하는 결론이었을 것이다. 그 결론은 자신 역시 서민의 정서에 기대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음이 틀림없다. 이후 달라진 대통령의 말과 행동이 말해주고 있다.
벼슬도 빽도 없이 한미한 사람들이 서민이다. 어느 시대나 그 같은 장삼이사 계층은 절대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다. 서민의 개념은 또한 상대성이다. 잘사는 사람보다 조금 못해도 스스로를 서민으로 친다. 우리 사회는 경제위기를 겪을 때마다 빈부 양극화 골이 깊어졌다. 요즘 들어 상위계층(20%)과 하위계층(20%) 소득격차가 7~8배라고 한다. 중산층 소득자 5명 중 2명은 자신을 하위층으로 인식한다는 최근 조사도 있다. 서민의식이 그만큼 광범하다는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정치는 없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했다. 최대 다수의 행복을 좇는 공리주의와 친서민은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 공학적 장삿속으로도 서민 표를 챙기는 것이 이문이다. 대책 없는 포퓰리즘으로 빠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 대통령이 서민에 집중해서 잃을 건 없다. 부자들이 불평할 수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돌아서지는 못할 것이다. 좌파 10년의 학습효과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울타리를 지켜주는 한 부자들의 선택은 오른쪽일 수밖에 없다. 서민 편애 소리를 들어도 괜찮은 이유이고 셈법인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한건주의로는 박수가 오래 가지 못한다. 이미지 조작도 얼마 못 간다. 가슴 깊숙이 스미는 친서민의 온기여야 한다. 진정으로 서민대중 정서에 마음을 포개는 정치가 그것이다. 훗날 그리운 대통령으로 남는 길이 거기 있다.
金成奎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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