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로 읽는 한권] 원작 문학작품의 영화화 상상의 가시화가 주는 희열

입력 2009-09-30 07:40:39

좋은 문학 작품을 읽은 뒤 그것을 다시 영화로 감상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진진한 일이다. 문학 작품을 통해서 가지게 되었던 상상이 영화감독의 연출을 통해 엇비슷하게 구체화되는 것을 지켜볼 때가 특히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마르그리뜨 뒤라스의 '연인'을 장 자크 아노의 영상으로 접했을 때 가장 큰 희열을 느꼈는데, 막 텍스트에서 분사되어 나온 듯한 메콩강과 깡마른 여배우의 중절모, 생사 원피스는 그야말로 '내 느낌상으로는' 완벽한 가시화의 즐거움을 보여줬던 것 같다. 영상은 글자에 비해 노골적이고 제한적이지만, 그만큼 강렬하고 인상적인 법이다.

나는 생사로 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 옷은 낡았고 속이 훤히 내비치다시피 했다…. 그날 그 소녀의 몸차림에서 대담하고 놀라운 것은 꼭 그 하이힐만은 아니었다. 소녀는 남자용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장밋빛을 띤 일종의 펠트모자엔 커다란 검은 리본까지 달려 있었다. 그 영상의 결정적인 모호함은 바로 그 모자에 있다.

『연인』 마르그리뜨 뒤라스 지음/김현아 옮김/산호/351쪽

훌륭한 영화를 본 뒤, 원작 소설이나 만화를 되짚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순수의 시대'는 그 자체로 한 폭의 슬프고 아련한 수채화와 같은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그 이면에는 역시 원작자 이디스 와튼이 새겨놓은 정교한 텍스트의 밑그림이 있다. 스콜세지가 이 걸작을 정밀한 고증을 거친 예우로 복원했다고는 하나, 역시 텍스트의 두터운 볼륨이 가지는 매력은 러닝타임 2시간짜리 영화로는 미처 다 전달되지 못할 뭔가가 항상 있다. 영화에서 모노톤의 붉은 영상으로 그려졌던 미셸 파이퍼의 애절한 뒷모습을 와튼은 이렇게 섬세하게 적고 있다.

'저 배가 등대를 건너 해안에 닿을 때까지 그녀가 돌아보지 않으면 그냥 돌아갈 거야.' 배는 파도에 휘말려 오락가락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하다가 라일 록 등대쪽으로 미끄러지더니 반짝반짝 불빛을 내뿜는 타워를 지나쳤다. 그는 해안까지 바싹 다가서려는 파도가 배의 몸체에 부딪쳐 하얀 물거품을 뿜어내는 것을 지켜보면서 숨죽이며 서있었다. 하얀 물거품도 그것 하나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더니 찰나지만 일생이 있었다. 원두막의 숙녀(올렌스카 백작부인)는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았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와튼 지음/석은영 옮김/오리진/437쪽

걸작 영화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탄생되는 경우도 많지만, 걸작 영화가 원작 소설의 탄탄한 서사를 기반으로 완성되는 경우는 더욱 많다. 이러한 경향은 순수예술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한 번씩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진정한 힘은 미국의 장르 문학의 두터운 작가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에 비하자면 우리나라 영상 산업은 근육의 성장을 이뤘으되 그 두뇌를 구성할 만한 다양한 작가층이 한참 부실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야만의 시절, 방치된 상상력들이 언젠가 이 땅에 전화위복으로 돌아올 날을 고대한다.

박지형(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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