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이야기지만 결국 관객은 울고 만다
죽음은 결코 영화처럼 멋있거나 장렬하지 않다. 그저 두렵고 안타깝고 슬플 뿐이다. 하지만 한 번쯤 그런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짐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음 앞에 선 사람들은 처음엔 부정하다가 그 다음에는 분노하고, 마지막에는 체념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발버둥 쳐 봐야 피할 수 없다. 그렇게 세상과의 이별을 받아들일 즈음,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본다. 남겨진 사람이 떠오르고, 그와의 사랑이 떠오른다. 사랑을 남겨두고 떠나는 길은 한 걸음이 만리길이다. 차라리 사랑을 정리하고 싶어진다. 달래서 떠나보내든, 윽박질러서 진저리를 치게 만들든 그렇게 사랑을 정리해야, 가는 사람도 남겨진 사람도 조금은 편안할 것 같다. 하지만 생각뿐이다. 심장을 갉아먹는 듯한 지독한 외로움에 치를 떤다. 사랑을 등 떠밀어 보내면서도 차마 움켜잡은 손을 놓지 못한다. 늘 그랬다. 전혀 다른 두 얼굴, 사랑과 죽음은 하나의 공통분모를 지녔다. 그것은 바로 '눈물'이다.
◆김명민 때문에 본 영화, 하지원을 사랑하게 되다
영화 '죽어도 좋아', '너는 내 운명', '그놈 목소리'를 연출했던 박진표 감독의 네 번째 장편 '내 사랑 내 곁에'. 수애와 조승우가 주연한 '불꽃처럼 나비처럼'과 함께 추석 극장가를 찾아왔다. 무엇을 볼까 고민하다가 '내 사랑 내 곁에'를 택한 이유는 김명민 때문이었다. 20kg이나 감량한 지독한 연기파 배우. '하얀거탑'에서 야망을 쫓다가 결국 불치병으로 죽음을 맞는 외과의사 장준혁으로,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독설을 인사말처럼 내뱉는 천재 지휘자 강마에로 등장했던 배우 김명민(37). 맡은 배역마다 하나의 신드롬을 일으켰다. 연기자 김명민이 장준혁과 강마에 역할을 맡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 장준혁과 강마에가 됐다.
"(내 작품은) 항상 배우가 무기"라고 말하는 박진표 감독의 말 그대로 김명민의 연기는 뛰어났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다는 루게릭병. 한 남자의 죽어가는 모습뿐 아니라 죽음과 사랑 사이의 갈등이 스크린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하지만 영화를 빛나게 만든 것은 김명민만이 아니었다. '내 사랑 내 곁에'는 하지원(31)의 재발견이었다. 1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해운대'에서 강연희 역으로 팬들의 심금을 울리더니 이번엔 장례 지도사라는 특이한 직업을 지닌 이지수로 찾아와 눈물샘을 펑펑 솟게 만들었다. 하지원은 참 예쁜 배우다. 어디선가 본 듯한 수수한 아름다움은 어느 배역을 맡아도 편안하게 관객에게 다가오는 장점을 지녔다. 거기에 연기력까지 겸비했다. 눈이 뻑뻑해질 정도로 영화를 보며 눈물을 쏟았다. 나중에 찬찬히 생각해보니 죽어가는 남자 때문이 아니라 남아있는 여자 때문이었다.
◆죽음을 앞에 둔 남자와 죽음을 곁에 둔 여자
종우(김명민)는 어머니 장례식에서 장례 지도사 이지수를 만난다. 루게릭병에 걸려 이미 휠체어에 의존하고 있는 종우는 첫눈에 지수를 알아본다. 어릴 적 같은 마을에 살았던 장의사집 딸. 장례식장에서 갈아신을 양말을 건네는 지수에게 종우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며 양말을 신겨달라고 한다. "아저씨가 잘 생겨서 신겨 드린다"고 말하는 지수는 그제서야 종우를 알아본다. 어머니의 염을 하는 지수의 손길을 바라보고, 곱게 시신을 단장한 뒤 거울까지 보여주는 지수를 보며 종우는 뭔가 운명적인 만남을 직감한다. 장례가 끝난 뒤 종우는 품 속의 하얀 국화를 꺼내 건네며 지수에게 "내 곁에 있어달라"고 말한다. 비록 루게릭병에 걸렸지만 그는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꼭 나을 거라고 믿는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그는 법전을 줄줄 외울 정도지만 병 때문에 공부가 여의치 않은 상태다.
장의사집 딸 지수는 장례 지도사라는 직업을 소중하게 여기는 아가씨다. 사실은 두 차례 이혼 경력이 있는 돌아온 싱글. 이혼 사유는 직업 때문이다. 시체를 닦는 지수의 손이 무섭다는 게 이유란다. "아저씨는 내 손이 무섭지 않아요?"라는 지수의 물음에 종우는 "무슨 손?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손?"이라고 답한다. 불치병에 걸려 죽음으로 향하는 한 남자와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한 여자. 어쩌면 이 둘의 사랑은 운명적이라는 말만으로도 부족한 것 같다. 지독히 외로운 두 남녀의 만남은 그 순간부터 둘이 아닌 하나였으니까.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한 그들의 사랑
영화는 참 차분하게 흘러간다. '너는 내 운명'의 교도소 면회실에서 발버둥 치는 장면처럼 클라이맥스도 없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영화는 주인공의 생각과 감정선을 찬찬히 따라갈 뿐이다. 그래서 영화 속으로 빠져드는데 시간이 조금 걸린다. 죽음이라는 뻔한 결론이 있기에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종우는 어느새 모든 근육이 마비되고 의식만이 남아있는 상태가 된다. 한밤중 곱게 립스틱을 바른 지수는 눈만 깜빡이며 침대에 누워있는 종우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준다.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 흐른다. '항상~ 나의 곁에 있어줘'라는 가사와 함께 지수는 깜찍한 핑클의 춤을 춘다. 종우만을 위해. 종우의 마지막을 위해. 그리고 홀로 남겨질 자신을 위해.
토마스 얀 감독의 1997년 작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가 불현듯 떠올랐다. 불치병에 걸린 두 남자의 마지막 여행. 병원에서 만난 두 사내. 그들은 병원 침대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기를 거부했다. 아직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친구의 말에 마지막 여행을 제안하고, 이들은 세상을 향해 한바탕 외친 뒤 꿈에 그리던 바닷가에 도착한다. 저 멀리서 삼킬 듯이 밀려드는 파도를 배경으로 나란히 앉은 두 남자. 음악이 흐르고 한 남자는 조용히 옆으로 쓰러진다. 바닷가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은 두 사내와 루게릭으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종우. 이들은 시인 천상병이 '귀천'에서 고백했듯이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를 눈에 품고 돌아갔으니까. 그리고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아니 죽음 따위는 아무 상관없이 사랑해 준 사람이 있었으니까.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