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낙동·백두를 가다] (38) 문경 길②

입력 2009-09-18 08:41:01

명현거유들의 여행길, 때로는 상소길·요양길

돌고개 성황당에 모셔져 있는 신상.
돌고개 성황당에 모셔져 있는 신상.
등산객들이 문경새재 정상의 3관문을 지나 영남 땅에 첫발을 딛고 있다. 문경새재는 조선의 과거길이었다. 장원급제자의 기쁨과 낙방거사의 슬픔이 교차했고, 때론 요양과 상소길이요, 명현거유들의 여행길이기도 했다.
등산객들이 문경새재 정상의 3관문을 지나 영남 땅에 첫발을 딛고 있다. 문경새재는 조선의 과거길이었다. 장원급제자의 기쁨과 낙방거사의 슬픔이 교차했고, 때론 요양과 상소길이요, 명현거유들의 여행길이기도 했다.

진남교반 돌고개 마을에는 성황당이 하나 있다. 문경새재를 목전에 둔 영남대로가 지난다. 또한 문경새재 '과거 전설'의 상징이다.

'옛날 과거길에 오른 어느 선비가 이곳의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하루를 묵게 됐다. 그 집에는 아버지와 딸이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이 선비의 인품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자기 딸을 맡아 달라고 간청해 승낙을 받았다. 선비는 며칠을 머물다 딸과 과거급제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처녀는 매일 치성을 올렸고, 선비는 급제를 했으나 약속을 잊어버렸다. 선비가 돌아오지 않자 처녀는 선비를 원망하며 자결한 후 큰 구렁이로 변했다. 그 후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구렁이에게 자주 피해를 입는다는 말이 온 사방에 퍼졌다. 선비는 그제서야 이 구렁이가 처녀의 원기임을 알았고, 그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올렸다. 천둥번개와 함께 구렁이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사라진 뒤론 구렁이 피해는 더 이상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성황당을 짓고, 지금도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돌고개의 또 다른 이름은 '꿀떡고개'이다. 꿀떡을 파는 떡가게가 있어서 꿀떡고개이기도 하고, 숨이 차올라 '꼴딱고개'이기도 하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이 꿀떡고개에서 반드시 꿀떡을 먹었다고 한다. 이 고개에서 꿀떡을 먹어야 과거에 급제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꿀떡을 한 입에 베어 문 선비들은 힘차게 한양으로 향했고, 결국 장원급제해 금의환향했다고 한다.

문경새재는 조선의 과거길이었다. '조선의 과거는 새재로 통했다'는 이야기다. 추풍령이나 죽령 등 다른 고개도 많은데, 왜 선비들은 전설까지 남기면서 굳이 문경새재로만 가려고 했을까?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은 문경새재, 경북 김천과 충북 영동을 잇는 추풍령, 영주와 충북 단양을 잇는 죽령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호남의 선비들도 문경새재를 넘고 싶어했다고 한다. 문경새재는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 영남대로가 지나는 곳이며, 당시 사람과 물류가 가장 많이 이동하는 나라 안의 가장 큰 길이었다. 군사 요충지로 군사들이 지키는 곳이어서 선비들이 과거길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부산 동래에서 한양까지 과거길에 오른다고 가정할 때 문경새재는 가장 짧은 길이었다. 문경새재는 열나흘, 죽령은 보름, 추풍령은 열엿새가 걸렸다.

또 문경(聞慶)이라는 지명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고, 옛 이름이었던 문희(聞喜) 역시 '기쁜 소식을 듣는다'라는 뜻이어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이 유독 문경을 고집한 또 다른 이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새재의 장원급제길은 정상의 3관문 바로 아래 1㎞ 남짓으로 매우 가파르다. 이 길엔 선비들의 청운의 꿈이 수백년 묻혀 있고, 급제 후 고향으로 내려오는 영광의 순간순간들이 담겼으리라.

급제자의 금의환향과는 달리 낙방거사들은 절망과 좌절, 한편으론 권토중래의 결심으로 새재를 넘었을 것이다. 그 쓰라린 심정은 어떠했을까?

조선 후기 때 예천 사람 박득령은 "해마다 올라오는 한양이었으나 금년처럼 우울하고 씁쓸한 여행길은 없었다. 길동무도 없이 가는 발길이 너무 무거웠다"며 낙방의 심정을 글로 남겼다.

또 안동 사람 유우잠은 "지난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 올해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 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 신세. 필경엔 허망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라며 비탄지경을 노래했다.

길은 여행이라는 풍경도 있다. 새재가 바로 그러하다. 선비들의 새재 여행은 자연풍광에 대한 감탄만은 아니었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경험이자 치열한 자기 수련의 과정이었다.

"먼 이곳에서 흥 있어 괴롭게 읊조리니 늦가을 강가서 이별의 뜻 깊어라. 필마로 십 년 세월 이리저리 다녔거니 세 잔 술로 천리길 가고 남는 심정이네. 낙엽은 쓸쓸하게 용추(새재 내 경승지) 가에 떨어지고 슬픈 저 구름 조령 산그늘로 싸늘하네. 이번 걸음 이내 회포 더욱 맺혀있거니 꿈속에서 자주자주 고향 산천 떠오르네."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이 문경새재에 이르러 아우에게 보내는 시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점필재 김종직, 문경 출신의 성리학자인 옥소 권섭 등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현거유들은 새재를 넘으며 인생과 철학, 예술을 노래했고, 글로 남겼다. 여행길에서 얻은 인생에 대한 통찰을 수준 높은 문장으로 표현해 놓은 예술작품이요, 그 시대의 사회와 풍속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귀중한 인문유산이 아니겠는가.

새재는 때론 요양길이었고, 상소길이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한강 정구가 한양에서 동래 온천으로 떠났던 요양길과 서원이 철폐될 위기 앞에서 한양으로 떠났던 안동 유생들의 상소길은 길이 갖는 또 다른 의미일 게다. 문경새재박물관은 기록에 근거해 생생한 그림으로 재현하고 있다.

"1617년 음력 7월 20일 초가을. 한강 정구는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동래 온천행에 나섰다. 늙은 스승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제자와 관료들이 배웅했고, 많은 제자들이 스승의 요양길에 동행했다. 일행은 배에 올랐고, 배를 대는 곳마다 사람들의 전송이 끊이지 않았다. 동래까지 가는 길에 새재를 넘어 대구 도동서원에 들러 분향을 했고, 남명 조식을 봉향한 신산서원에도 들렀다. 육로로 이동을 할 때는 말을 타거나 가마의 일종인 남여(籃輿)를 이용했다. 한강 선생은 한 달 동안 동래온천에 머물며 약과 온천욕을 하며 지병을 치료했다. 요양 후 돌아오는 길, 동래부사의 석별연에 참석한 뒤 육로를 이용했다. 경주에 들러서 경주부윤이 포석정에서 열어준 연회에 참석했고, 계림·첨성대 등 경주의 유적지를 방문했다. 요양의 효과 때문인지 열흘에 걸친 귀갓길은 고적을 탐방하고 연희를 즐기는 등 한층 가벼운 여행길이었다. 귀가할 때까지 30여 명의 제자가 동행했다".

요양길의 반대 방향은 상소길이었다. "1717년 안동의 사빈서원이 철폐 위기에 놓이자 서원의 유생들은 한양으로 올라가 궁궐 앞에 엎드려 임금께 상소문을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주변의 서원과 선비들까지 여행 경비를 보탰다.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가는 길 숙소에선 상소문을 수정하고 대책을 의논했고, 하루에 무려 100리 길을 걸어 출발한 지 8일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조정에 상소문을 전달하는 과정(봉입)이 수월하지 않자 백방으로 도와줄 사람을 찾아다녔고, 다섯 차례나 봉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양식과 여비도 떨어져 고향 안동으로 사람을 내려보내 지원을 부탁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비변사로부터 '지방서원 철거에 조정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결과를 얻어냈고, 두 달여 만에 사원철거 명령 철회 소식을 안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길은 떠날 때는 길손들에게 슬픔과 걱정을 줬지만 돌아올 때는 기쁨과 여유를 준 것이다. 과거, 낙방, 요양, 여행, 상소, 자기수련…. 삼라만상이 바로 문경새재에 있지 않겠는가.

이종규기자 문경·권동순기자 사진 윤정현

자문단 안태현 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정옥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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