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갤러리] 설교 후의 환영

입력 2009-09-12 07:04:58

한 화폭에 현실과 환상의 세계가 공존하는 특이한 구성

제목: 설교 후의 환영(야곱과 천사의 싸움)

작가: 고갱(Paul Gauguin: 1848~1903)

제작연도: 1888년

재료: 캔버스 위에 유채

크기: 73×92cm

소재지: 영국, 에든버러, 스코틀랜드국립미술관

세잔, 고흐와 더불어 후기인상주의를 대표하는 고갱은 여러 면에서 고흐에 비견되는 화가이다. 둘 다 일요화가로 출발하여 뒤늦게 전업화가로 변신한 것부터 새로운 화풍, 주변의 몰이해, 경제적 궁핍, 격정적인 성격, 정신질환 그리고 비극적인 종말과 사후에 그 재능을 인정받은 점 등 많은 점에서 서로 유사한 인생역정을 겪었으나 회화사에서 이룩한 고갱의 업적은 고흐의 그것을 넘어 선다고 할 수 있다.

35세의 나이에 증권거래소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당시 유행하던 인상주의 화풍으로 전업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고갱은 곧 인상주의의 미학적인 한계, 즉 지나친 자연에의 종속, 특히 끓임 없이 변화하는 광선을 쫓아가는 자유분방한 색채가 '사고(思考)의 깊고 신비스러운 곳'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갱에게 1888년 퐁타뱅(Pont-Aven)에서의 베르나르(E. Bernard)와의 재회는 그의 예술관과 기법의 전환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다. 화가이자 이론가였던 베르나르는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테두리를 마치 스테인드글라스나 칠보공예에서처럼 굵고 검은 선으로 두른 다음 그 안을 강한 색으로 편평하게 칠하는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키게 되는데 그 기법의 명칭도 칠보공예에서 차용해 '구획주의'(Cloisonnisme)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고갱이 베르나르에게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은 베르나르의 그것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화폭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사과나무를 경계로 좌측에는 기도하는 브르타뉴 여인들로 구성된 현실의 한 장면이, 그리고 우측에는 여인들이 설교를 듣고 난 후 보게 되는 환영, 즉 환상적인 세계가 공존하는 특이한 구성을 보여 준다.

조형적인 혁신도 이에 못지않다. 주된 모티프인 천사와 야곱을 화면 가장자리에 작게 배치하는 수법은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대각선으로 그려진 나무둥치와 하향식 원근법, 색채의 평면성은 굵은 윤곽선과 함께 일본의 목판화를 연상시키는데, 특히 씨름하는 천사와 야곱은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의 작품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붉은 색으로 편평하게 처리되어 있는 바닥은 회화사에서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구획주의로 인해 화면 전체가 평면화되는데, 약화된 깊이감을 전경의 브르타뉴 여인들과 원경의 천사와 야곱의 크기 비례에 의해, 즉 르푸소와르(Repoussoir) 기법에 의해 보전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색채를 어떤 사물을 묘사하는 전통적인 역할로부터 해방시켜 '색채의 자율성'을 회복한 것인데, 이제 색채는 색채 자체가 가지는 조형적 가치에 의해 선택되거나, 또는 작가의 감정이나 관념을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내면에 깊숙이 감추어진 인간 사고의 비물질적이고 반자연주의적인 세계를 표현하려 했던 고갱에게 있어 구획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이 그림은 강렬한 형태와 색채의 종합으로 소위 관념의 조형화를 지향하면서 현대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권기준 대구사이버대 미술치료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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