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조 들여다보기] 귀또리 저 귀또리

입력 2009-09-12 07:05:56

귀또리 저 귀또리

무명씨

귀또리 저 귀또리 어여쁘다 저 귀또리

어인 귀또리 지는 달 새는 밤에 진 소리 짜른 소리 절절(節節)이 슬픈 소리

저 혼자 우러네어 사창(紗窓) 여윈 잠을 살뜰히도 깨우는고야

두어라 제 비록 미물(微物)이나 무인동방(無人洞房)에

내 뜻 알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귀뚜라미, 저 귀뚜라미, 어여쁘다 저 귀뚜라미/ 어인 귀뚜라미인가. 지는 달 새는 밤에 긴 소리 짧은 소리 마다마디 슬픈 소리로 제 혼자 울면서 사창에서 얼핏 든 잠을 살뜰하게도 깨우는구나/ 두어라 제 비록 벌레에 지나지 않는 것이나 님이 안 계시는 외로운 방에서 나의 뜻을 알아주는 것은 너뿐인가 하노라.

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명문가의 여성 작품으로 판단된다. 귀뚜라미 소리에 반응하는 감성도 그렇지만 '사창'과 '무인동방'이란 낱말이 그렇게 생각하게 한다. '사창'은 흔히 비단을 바른 창으로 해석하지만 고급비단이 아니라 바탕을 조금 거칠게 짠 것이며, 여인이 거처하는 방을 가리키기도 하고 '무인동방'은 임이 없는 외로운 여인의 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초장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귀또리가 가을에 어울리는 운율을 만들어낸다. 중장에서는 밤이란 시간을 '지는 달, 새는 밤'으로 구체화시켰으며, 그 소리를 반복하여 만든 가락이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여윈잠을 살뜰히 깨운다는 표현이 참 맛있다. 설핏 든 잠을 확 깨운다는 뜻일테지만, 여성의 미덕인 살뜰에 연결시킨 것은 말맛을 한껏 살린 것.

종장에서는 참 하잘것없는 벌레에 불과하지만 외로움이라는 같은 병을 앓고 있음에 대한 연민의 정을 보내는 것이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외로움이 하도 깊어서 단시조에 그 심정을 다 담을 수 없어 중장이 길어진 장형시조가 되었지만 길어도 긴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떠오르는 작품이 되었다.

사람이 외로우면 무엇에게나 의지하고 싶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인지상정. 외로운 가을밤귀뚜라미 소리에 제 외로움을 얹어보는 것. 그것이 옛 여인만의 심사이겠는가. 외로움에 빠지면 귀뚜라미가 짧게 울어도, 길게 울어도, 마디마디 슬픈 소리가 되고 마는가보다. 귀뚜라미 우는 가을밤이 외로우면 우리는 그 외로움을 어디에다 실어야 하는가.

문무학 시조시인 · 경일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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