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했기에, 숨 막히던 고독조차 행복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기자님. 보내주신 메일 너무 반가웠습니다.
글을 보니 그간 고생하신 것 눈에 선합니다. 이상기 경사 사건 때에도 바로 옆에 계셨더군요. 그때 저도 너무나 아린 마음에 미망인께 약간의 조의금과 편지를 드렸었는데….
지난번 사진 보내주신 것에 대해 언젠가 감사의 표시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벌써 나오실 때가 되어버렸군요.
급하게 택배로 독도경비대 앞으로 작은 먹을거리를 보냅니다. 큰 건 아니고 쇠고기 육포 조금입니다. 바다 생활에 해물은 잘 드시겠지만 아무래도 고기는 잘 못 드실 것 같아서….^^
계실 때 받으시면 대원들에게 고 주재원 경위의 아들이 보낸 거라고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목젖이 얼얼하다. 며칠 전 독도에 있는 동안 메일을 주고받았던 분들에게 작별인사 삼아 메시지를 보냈다. 뜻하지 않았던 주재현씨의 메일이 도착했다.
수원에 살고 있다는 주씨는 1982년 독도경비대장으로 근무하다 순직한 울진 출신 고 주재원 경위의 두 아들 중 장남이다. 주재현씨는 아버지가 전마선 전복으로 순직할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홀어머니 아래 자란 주씨는 지금 세무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대학시절 어느 날 만화방에서 빈둥거리다가, 텔레비전에 비친 아버지의 위령비를 보고, 마음을 다잡고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주씨는 인터넷에 올라오는 독도에 관한 기사는 빠짐없이 본다고 했다. 그는 '여기는 독도'를 보고 응원 메일을 보내 이렇게 적었다. 환갑이 된 어머니한테 '이젠 같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독도를 한 번 가보자'고 했더니 어머니는 '그 웬수 같은 데를 왜 가'하면서 독도에는 가지 않겠다고 했단다. 그는 과연 독도는 누가 지켰느냐고 울분을 토했다. 그는 또 아버지의 위령비만이라도 보고 싶으니 사진 좀 찍어서 보내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메일을 받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청상에 혼자된 어머니와 그 어린 핏덩이들이 작달비를 맞으며 살아온 팍팍한 날들이 선하게 그려졌다. 이젠 어른이 되어 꿈속에서나마 아버지를 한번 보고 싶다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순직 독도경비대장의 아들…. 그가 독도로 육포를 보냈다고 한다.
지난해 7월 일본 사회교과서 해설서에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했을 때 온 나라가 벌집 쑤신 듯했다. 그때 목에 가시처럼 걸린 매천 황현 우국지사의 유서 한 구절.
'내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아 가히 죽을 이유는 없지만… 나라가 망한 날 선비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다면 이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그 한마디 준엄한 꾸짖음에, 뒤를 쫄쫄 따라다니며 '못 간다'고 염불하듯 외어대는 팔순 노부모의 만류도 뿌리치고, 코펠 하나 챙겨 둘러매고 무작정 독도로 향했다. 잠 잘 방이 없어 김성도 이장 내외분과 한 방에 자면서 시작한 독도 생활이었다.
숨 막히는 더위 속에 바다 모기에 물려 밤새 긁어대던 여름. 외로움에 힘겨워 몇 번 다닌 막창집 주인한테 괜히 전화 걸어 '손님 많은가' 묻기도 하고, 집근처 낚싯방 주인한테 '요즘 조황이 어떠냐'고 묻기도 했던 가을. 바람만 벽체를 흔들고 바다는 울부짖어 천지가 뒤집어지는 두려움에 '길고도 길구나 겨울밤'을 수도 없이 중얼거리던 겨울. 머리며 등줄기며 범벅이 된 갈매기 똥을 물이 모자라 씻지도 못하고 웅크리고 자야 했던 봄날들…. 그렇게 네 계절은 흘러갔다.
사계를 보내는 가운데, 지난가을 많은 분들이 찾아와 손을 잡고 격려해주고, 메일을 보내오고 매일신문 지면을 통해 응원해줬던 생면부지의 뭍의 사람들. 부식이 바닥나고 술도 떨어졌을 때 봉지에 소주병 담아 던져주고, 잡은 문어 던져주던 고깃배 선장님들. 바다 모기에 물렸다니 해충퇴치약 보따리를 보내준 미국 교포 두 분. 중국서 미국서 들어와 없는 시간 쪼개 독도까지 찾아와 양갱이며 캔맥주를 건네준 지인들…. 감사할 따름이다.
'무상하다'는 말뜻을 잘 몰랐다. 독도에서 1년을 지내고 난 지금, 이런 것들을 회상하니 그 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섬에 있던 동안 나는 가만히 엎드려 있는데, 시간은 저 혼자 급하게 달려갔음을 알겠다.
"기자가 독도에 뭣 하러 들어가 있는데? 불경기에 팔자 좋네."
세상 사람들이 그러저러 빈정댈지라도 이 조그만 바위섬을 지키기 위해 주재원 경위처럼 목숨 바친 사람들의 피와 땀은 결코 옅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 희생으로 아직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시퍼렇게 살아있음에야. 아직 불온한 무리들은 독도를 삼킬 온갖 계략을 꾸미고 있는데….
독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때문에 독도는 총성 없는 전장이고, 독도 상주기자는 노트북을 든 종군기자일 뿐이다.
빈정대도 좋다. 그러나 단 한 가지만은 기억하자. 독도를 범하고자 노리는 무리들은 언제나 우리가 약한 모습을 보일 때 멱통에 칼을 들이댄다는 사실을. 그래서 젊은 피를 뿌려서라도 이 영토, 독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러닝셔츠도 1년간 입었더니 이젠 구멍이 났다. 그래 떠날 준비를 하자. 헬기에서 내려다본 독도의 모습도, 해경 함정에서 치어다본 독도의 영상도, 흰 눈 뒤집어쓴 채 늑골을 드러낸 독도의 그림도 모두 갈무리해야 할 때이다.
칠흑 같은 밤 서러움에 흘린 눈물도, 찬바람 속 바위에 올려놓고 먹던 '코펠 라면' 맛도, 등줄기 뜨뜻미지근한 갈매기 똥의 느낌도 모두 지울 때이다. 깔따구에 온통 뜯긴 밤들에 미련두지 말고 떠날 일이다. 씻어도 씻어도 비눗기가 지워지지 않는 미끈미끈한 물이 지겹다고 투덜대며, 사방을 둘러봐도 와글대기만 하는 바다에 지쳤다며 돌아설 때이다.
그렇지만 주재현씨가 보낸 육포만은 꼭꼭 씹으며 돌아가는 배에 오르겠다.
지난 1년간 영글지 못한 글 '여기는 독도'를 인내심으로 읽어준 분들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드리고 이제 독도와 작별한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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