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안 읽는 바보
귀뚜라미 소리가 또렷하게 들린다.
조선시대 문인 이덕무의 '가을밤'이라는 글이 생각난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빛이 쏟아지고, 땅에 귀를 기울이면 벌레 소리 가득한데 그 가운데서 등불을 켜 들고 책을 읽었다는 불운한 문장가 이덕무에게 책은 어떤 위안을 주었을까?
얼마 전 정년퇴직하신 은사님이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내 몫으로 남겨 두셨다. 선생님께서는 제자가 아직은 학문에 더 정진해야 한다는 생각에 당신이 아끼시던 책을 물려주신 거지만 나는 책을 얻은 기쁨보다 이 책을 어디다 쌓아둘 것인가, 이 책을 읽기는 읽을 것인가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책에 대한 욕심이 나도 모르게 사라진 것이다.
초등학교 때 도서관에서 오래되고 낡은 책을 정리하는 선생님 일을 도와드린 적이 있다. 그때는 새 책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전부 풀로 붙이거나 앞뒤를 꿰매야 그나마 책이라고 들고 읽을 수 있었다. 일이 끝나면 선생님은 우리를 데리고 학교 앞 빵집에 가시곤 했는데 빵보다 더 달콤했던 건 가끔씩 책을 얻는 재미였다. 앞뒤가 다 떨어져 나가 더 손볼 수 없는 책은 아이들에게 한 권씩 나누어 주셨는데 그런 날은 빵집에 가는 것만큼 배가 부르고 신이 났었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었으니 비록 앞뒤가 다 떨어져 나간 책이었지만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책을 많이 갖고 싶다는 그때의 결핍이 지금껏 책에 대한 욕심만 키워 온 것 같다. 그러나 읽을거리는 날마다 쌓여 가는데 번잡한 일상에 쫓겨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어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해지려고 한다.
책 한 권을 얻으면 기뻐 읽고 중요한 부분을 베껴 적어 그 깊은 뜻을 익히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이덕무를 사람들은 '책에 미친 바보 간서치(看書痴)'라고 불렀다. 처음 책을 얻은 기쁨에 밤새워 앞뒤 내용을 상상하며 읽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쉽게 버리지도 못하고 언젠가는 보겠지, 언젠가는 쓰겠지 하는 생각에 책을 쌓아만 두고 있으니 나는 책이 있어도 읽지 않는 바보 아닌가.
가을은 여름 내내 열어 젖혀둔 문을 닫듯 자신을 안으로 불러들이는 계절이다. 그동안 뭘 했나, 문득 뒤가 돌아봐지는 때다. 총총해지는 저 귀뚜라미 소리가 그동안 밀쳐둔 책을 꺼내 읽으라는 재촉 같이 들린다. 이제 별빛과 벌레 소리에 기대어 책을 읽었던 옛사람의 그림자에 내 그림자를 겹쳐놓고 싶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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