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목천 위 빛과 그림자가 빚어낸 '공간'
한 아버지가 있었다. 큰딸이 학용품 살 돈을 달라며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볼 때, 생활비가 빠듯한 아내가 차마 말 끝을 잇지 못하고 배웅할 때, 호주머니에 든 5천원을 꺼내지 못하고 돌아선 아버지가 있었다. 한 화가가 있었다. 5천원을 줄 수도 있었지만 청도에 있는 작업실까지 차를 타고 갈 기름값으로 써야했기에 5천원짜리 지폐를 움켜쥔 채 눈물을 삼킨 화가가 있었다.
10여년 전 화가는 대구 한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캔버스의 평면을 벗어나 공간과 빛과 그림자를 담아놓은 파격적인 작품들. 아쉽게도 작품에 대한 찬사만 남긴 채 단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2주일 뒤. 화가는 부산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 우연찮게 참여한다. 당초 작품을 내기로 했던 다른 화가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탓.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전시장에 그림을 걸기 무섭게 작품이 팔려나갔다. 화랑 측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작품이 매진됐습니다." 이후 전시를 해달라는 화랑들의 문의가 빗발쳤다.
청도군 각남면 옥산리에는 지금은 폐교가 된 대산초교가 있다. 한때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떠들썩했을 그 교실 한 켠에 화가 남춘모(48)의 작업실이 있다. 2시간이 넘는 인터뷰 도중, 작가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말처럼 앞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림 그리던 붓을 멈추고는 잠시 상념에 잠긴 듯 '그 때 그런 일도 있었지'라는 투로. 작업실은 앉을 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어지럽다. 천 조각과 합성수지의 일종인 폴리코트, 작업을 기다리는 캔버스, 아크릴 물감통들이 바닥을 채웠다. 방충망은 거의 뜯겨져 나갔다. 그저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 밤이면 '절대 침묵'이 찾아드는 이 외로운 공간에서 작가는 지난여름 모기를 벗 삼아 그림을 그렸다.
미술 평론가 김미경은 남춘모의 작품에 대해 '공간 속에서 호흡하는 획(劃)'이라고 표현했다. 남춘모는 캔버스라는 평면 위에 공간을 창조하고, 그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속에서 빛과 그림자를 통해 만들어지는 '우연'을 즐기는 작가다. 공간을 만드는 방법은 독특하다. 우선 서문시장에서 사온 광목천을 4cm 폭으로 길게 자른다. 천을 'ㄷ'자 모양으로 나무 막대기 위에 길게 올려놓고, 마르면 딱딱하게 굳어지는 폴리코트를 바른다. 광목천 위에 말라붙은 폴리코트는 마치 손을 벨 것처럼 날카롭다. 이렇게 만들어진 'ㄷ' 모양의 기다란 광목천 조각을 수백 조각으로 자른 뒤 홈이 위를 향하도록 일정한 배열에 따라 캔버스 위에 붙인다. 그 위에 다시 아크릴 물감으로 바탕색을 칠한다. 다시 홈 사이를 다른 색깔의 물감으로 칠한다. 붙이고 색칠하는게 전부다. 무슨 형상을 그려넣지는 않는다.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냐?"는 물음에 작가는 "관객들이 내 작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도 궁금하다"고 답했다. "모든 그림은 작은 선들로 이뤄집니다. 저는 그 선들에 주목하는 겁니다. 그리고 선들은 입체를 통해 빛과 만나고 그림자를 만들죠." 독일의 한 갤러리의 전속 작가이기도 한 남춘모는 현재 독일 부퍼탈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을 하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으로 우뚝 선 그는 여전히 욕심이 많다. 물질적인 욕심이 아니다. 새벽 6시 무렵 청도 작업실로 나와서 꼬박 12시간 이상 작업에 매달린다. 작업실에서 잠을 청할 때도 부지기수다. 앞으로 그의 작업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 지 궁금하다. 평면을 벗어난 그의 입체는 더욱 조형화할 수도 있고, 다시 평면으로 귀의할 수도 있다. 늘 변화를 꿈 꾸는 작가 남춘모의 전시회는 4~22일 석갤러리에서 열린다. 053)427-7737.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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