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의 대학과 책] 『붉은 왕조의 여인들』(천지인, 2009)

입력 2009-09-02 13:35:37

식색은 본성이다(食色, 性也)

영웅호걸이 용쟁호투를 벌이는 강호의 세계, 그 이면을 들추어보면 재밋거리가 한 보따리 가득 쏟아집니다. 특히 근엄하고 엄격하다고 알려진 자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했던 자의 뒷이야기에서 예상치 못한 재밋거리를 찾을 때 즐거움은 배가 됩니다. 중국을 건국한 지도자들의 이야기가 바로 그렇습니다.

대만과 중국 모두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손문도 두 번의 결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첫 번째 부인 노모정(盧慕貞)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으면서도, 48세가 되는 1915년에 자신보다 26살이나 적은 송경령(宋慶齡)과 다시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 손문은 두 번의 정식 결혼 외에도 일본망명시절 또 한 번의 결혼을 한 적이 있습니다. 1907년 당시 15세 밖에 되지 않았던 하숙집 주인집의 딸 오쓰키 가오루코(大月薰子)에게 청혼을 한 것입니다. 슬하에 나카야마 도미코(中山富美子)라는 딸을 두었지만 손문이 중국으로 돌아가 송미령과 결혼하게 되자 일본인 아내는 자신의 사랑을 평생 가슴 속에 묻고 살았습니다.

중국의 황제가 될 뻔했던 대만의 초대 총통 장개석 역시 손문 못지않은 여성 편력이 있습니다. 장개석은 15세 때 모복해(毛福海)를 부인으로 맞아 후일 대만 총통이 된 장경국을 낳았습니다. 26세 때는 소주 출신 요이성(姚怡誠)을 첩으로 맞았고, 34세가 되던 해에는 다시 진결여(陳潔如)와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1927년 장개석은 중국 근대사를 좌우한 송씨 자매 중 막내 송미령의 마음을 얻기 위해 모복해, 요이성과 부부관계를 청산하고, 진결여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버립니다. 그해 12월 1일, 장개석은 송미령과 세기의 결혼식을 올립니다. 당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그 소식을 대서특필하면서 장개석을 현대 중국의 낭만적인 혼인 정복자로 소개했습니다.

이들의 여성 편력은 사회주의 중국을 개국한 모택동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합니다. 모택동의 마지막 아내인 강청은 세간에 네 번째 부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택동은 사춘기가 시작되던 13세 때 첫 경험을 한 이후 1976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주변에 무수한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첫사랑 왕십고(王十姑)와의 결혼에 실패한 모택동은 나씨 처녀라는 뜻의 나일고(羅一姑)와 결혼을 하였지만 말 그대로 결혼만 하였지, 실제 가계를 꾸리지는 못했습니다. 그 후 양개혜, 하자진, 여배우 상관운주, 영어 가정교사 장함지를 비롯한 수많은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모택동의 말년에 가장 가까웠던 여성 중의 한 명인 장옥봉은 전용열차의 직원이었습니다. 모택동이 그녀를 만났던 1960년대 당시 모택동의 초호화 전용열차를 노래한 민요가 전해집니다. '전용열차가 출발하면 천지가 진동하고, 전용열차가 서면 천지가 난리 나니, 열차가 다시 출발하면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네'

이 재미난 이야기들은 일본 당대 중국연구센터의 대표 겸 주임 연구원인 양중미 박사님이 집필하신 『붉은 왕조의 여인들』(천지인, 2009)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중국 지도자들의 애정 문제를 중심으로 중국 정치를 재해석한 아주 기발하고 재미있는 저서입니다. 정책 결정의 상당 부분이 애정 문제와 관련된 질투의 결과였다는 이야기들도 재미있고, 오늘날의 강한 중국이 모택동의 인수론(人手論)때문이었다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귀결을 중국 전통에서 찾아내어 연결시킨 점이 특히 돋보입니다. 다산을 강조한 모택동의 생각은 맹자가 말한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후손이 없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不孝有三, 無後爲大)는 전통 관념과 '사람이 많으면 일하기 수월하다'는 전통 농민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는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모택동이 없었다면 모택동의 여성 편력도 없었을 것이고, 다산이 강조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처럼 인구 13억의 초강대국 중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노동일(경북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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