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참 '별일 없어' 보인다
언젠가는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로 스파게티를 공부하러 가겠다. 아니, 스파게티 공부를 핑계로 한 3년쯤 로마에서 느긋하게 놀아보겠다. 놀면서 주워들을 이태리어도 쓸모가 있을 터이다. 한국으로 돌아오면 동네에 조그만 스파게티 전문점을 차려볼 수도 있겠고. 암튼 이 정도면 실현불가능하지도 않은 괜찮은 계획 아닌가.
친구들은 "저녀석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뜬구름 잡는구나, 서른다섯에 그런 건 계획이 아니라 망상이야"라고 말할테지.(실제로 그렇게 말한 친구가 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식당을 차리거나(장사를 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그런 건 나의 재능도 욕심도 아니다. 그렇다면 서른다섯에 왜 그런 철딱서니 없는 꿈을 꾸느냐고?
'로마'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하필이면 로마에서 살아보고 싶다.
왜 '로마'인가. 그곳에는 오렌지나무 가로수길이 있다. 활기차고 흥미진진한 시장이 열리는 광장이 있다. 쌀로 만든 싱싱한 아이스크림이 있다. 혀가 얼얼할 만큼 쓰고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가 있고, 당신 얼굴만큼 넓적하게 싹둑 썰어주는 피자가 있다. 그리고 낡고 빛바랜 노란 색 건물들, 활짝 열린 창문들, 빨래가 주렁주렁 널린 베란다들, 뜨거운 연인들, 귀여운 할머니들, 시끄러운 이태리어, 어디서나 들려오는 음악소리…. 낡고 정겹고 살아 있는 도시. 오래전부터 알아온 친구 같고, 하지만 알수록 비밀스러운 도시.
여행자에게 로마는 그런 곳이다. 그런 매력 넘치는 도시 로마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배신'을 당했다. 로마에게. 장소는 지하철.
유럽의 나라들이 대게 그렇듯이 로마에도 지하철이나 버스 승차권은 스스로 펀치(사용했다는 표시)해야 한다. 버스에 타거나 지하철 게이트를 통과할 때 스스로 펀치 기계에 승차권을 넣는 것이다. 가끔 검표원이 나타나 승차권을 검사할 때도 있지만 열흘에 한 번도 만나기 힘들다. 그래서 무임승차가 (말 그대로) 판을 친다. 게다가 로마는 가끔 무임승차를 할 수밖에 없는 도시다.
휴일이면 승차권을 파는 매점들도 문을 닫고, 지하철의 승차권 자판기 중엔 고장난 것들도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무임승차를 감행해야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로마에 처음 도착한 다음날, 나는 그리 배짱이 두둑하지도 못하면서 무임승차를 즐기는 여행자들 무리에 합류했다. 사실 나에게는
그날 쓸 수 있는 승차권 한 장이 있었지만 함께 나온 여행동무들이 모두 승차권을 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승차권 펀치를 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열흘에 한 번도 만나기 힘들다는 검표원을 하필이면 그날 만나게 되진 않을 것이며, 넷이나 되는 우리가 한꺼번에 그렇게 억세게 재수없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발휘했다. 그리고 지하철 게이트를 통과해서 첫 번째 코너를 돌자마자 검표원을 만났다. 억세게 재수없는 날은 어느 날 무심코 닥친다. 코너 저쪽에 이렇게 무시무시한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검표원들에게 걸린 수백명의 무임승차객들이 오만상으로 투덜거리며 줄을 서서 벌금내고 있는 믿을 수 없는 현장.
더 믿을 수 없는 건 나보다 약삭빠른 동무들은 모두 어딘가로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워낙 난리북새통인 그 현장에서 조금만 재빠르면 가능했을 터였다. 의리에만 용기를 발휘하는 굼뜬 바보였던 나만 줄을 서서 벌금을 물어야 했다. 무려 62유로. 당시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만원. 로마가 아니라 세상이 '빙글' 돌았다. 여행경비 아끼느라 로마에 와서도 스파게티 한 접시를 못 먹어본 터였다.
그 로마에서 나는 홧병이 났다. 벌금 62유로, 스파게티 한 접시, 벌금 62유로, 스파게티 한 접시…, 판테온을 가도, 트레비분수를 가도, 내 머리 속엔 온통 벌금과 스파게티 뿐이었다. 로마를 떠나기 전날 나는 드디어 레스토랑에 가버렸다. "스파게티 플리즈!!" 웃지도 않는 키 큰 여자가 스파게티 한 접시를 내 앞에 '탕!' 하고 내려놓았다. 이 여자 왜 이래, 나는 62유로 벌금을 물었을 때보다 더 화가 났다. "잠깐만요, 당신 왜 이렇게 불친절한 거죠?" 여자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탕, 하고 접시를 내려놨잖아요." 그제서야 여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쏘리!" 한 마디 내뱉고 돌아선다. 나는 부아가 치밀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탕!' 소리가 났다. 알고 보니 이 레스토랑에서 접시를 테이블에 '탕!'하고 내려놓는 건 정말 별일이 아니었다. 나는 머쓱해졌다.
왜 하필 로마인가. 아니 그냥 나는 그 로마라는 도시에서 두 다리 뻗고 멋대로 별일없이 살고 싶다. 왜 하필 로마이냐면 로마는 참 '별일없어' 보인다. 별일없이 무임승차하고, 걸리면 벌금 내고, 레스토랑에 온 손님한테 접시도 탕! 던져주고, 그 손님이 화내면 그냥 미안하다고 말해주면 되고. 오늘 문득 로마와는 별 볼일도 없고 상관도 없는 장기하의 '별일 없이 산다'를 들었다. '네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뭐냐 하면, 나는 별일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없이 산다….'(아니 뭐, 꼭 로마가 아니어도 된다. 별일없이 살면 된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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