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31만이던 인구 251만으로 늘어나
대구시가 15일로 환갑을 맞았다. 올해 광복절은 경상북도 도청 소재지였던 대구부(府)가 대구시(市)로 간판을 바꿔 단 지 60년이 되는 날이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헌법이 제정되고 행정체제 개편이 이뤄지면서 대구는 지방자치법률에 따라 1949년 광복절을 맞아 '시(市)'로 불리게 됐다. 하지만 대구시가 경상북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광역자치단체가 된 것은 1981년 7월 직할시로 승격하면서부터다.
◆부에서 광역시에 이르기까지
광복 이후 해외귀환 동포의 정착과 월남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대구는 대도시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구는 낙동강 방어작전의 최후 보루가 됐고 이후 서울, 부산에 이어 3대 도시로 자리 잡게 됐다.
대구는 부에서 시로 이름이 바뀐 뒤 수차례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면적, 인구 등이 줄었다 늘기를 반복했다. 시로 개칭됐지만 60년 전 대구의 면적은 115.64㎢로 부 시절과 다르지 않았고 인구는 31만3천705명에 불과했다. 그러다 1958년 동촌, 가창, 월배, 성서, 공산 등 달성군 일부 지역이 편입되면서 시 구역은 463.19㎢로 늘어났다. 인구 역시 61만4천명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1963년에는 대구를 관장하던 6개 출장소제가 폐지되고,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시에 편입됐던 성서, 월배 등 47개 동을 경북 달성군에 환원했다. 따라서 대구시는 5개 구에 101개 동, 면적은 181.72㎢, 인구는 64만7천명으로 규모가 축소됐다.
1981년 7월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경산군 안심면과 달성군 공산면이 동구로, 달성군 성서읍이 서구로, 달성군 월배읍이 남구로, 칠곡군 칠곡읍이 북구로, 경산군 고산면이 수성구로 각각 편입됐다. 1988년에는 달서구가 새로 생기면서 7개 구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됐다.
1995년 1월에는 시(市) 명칭을 대구광역시로 개칭해 지방화시대의 원년을 맞고 그해 3월에는 달성군을 편입해 지금과 같은 7개 구 1개 군으로 행정구역이 광역화됐다.
◆대구의 변화상은?
대구가 시가 된 이후 60년 동안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1949년 당시 31만명이던 인구는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251만명으로 8배가 늘었다. 시정은 대구부윤이던 허억씨가 초대시장에 취임한 이후 김범일 시장까지 31대를 맞고 있고, 4명의 시장이 연임해 모두 27명의 시장이 거쳐갔다.
시가지 모습도 크게 달라졌다. 60년 초까지 대구의 도로망은 전쟁에 대처하는 군사상의 목적과 부분적인 시가지 정비로 사실상 틀을 갖추지 못하다 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신설과 확장이 본격화된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중구가 시의 중심을 이루다 보니 당시에도 대구역전 중앙파출소, 반월당~삼덕동~대봉동, 동인로터리~신천교~아양교 등은 교통혼잡지역으로 꼽혔다.
1996년 11월에는 서울, 부산에 이어 지하철 1호선(진천~중앙로)이 개통됐고, 1998년 5월 대구역~안심 구간이 마무리된다. 2005년 지하철 2호선 문양~사월 구간이 개통된 데 이어 3호선 범물~칠곡 구간이 공사에 들어갔다.
전쟁 이전 6만7천가구에 불과했던 주택은 1967년 아파트 건설 붐이 일면서 증가하기 시작해 현재는 63만9천가구에 이르고 있다. 1962년 승용차, 버스, 화물차 등 자동차는 1천710대에 불과했지만 46년이 지난 2008년 말 현재 88만9천대로 무려 520배가 증가했다.
김범일 대구시장은 "대구가 최근 산업재편과 경기침체로 잠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2011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첨단의료복합산업단지 유치 등으로 재도약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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