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랑 산사람] 김천 황악산

입력 2009-07-30 14:07:00

천년고찰 직지사 품고 백두대간 준령 속으로

7월 어느날 아침, 청량한 기운이 산사를 둘러쌌다. 돌로 만든 작은 수로를 따라 실개천이 맑게 흐른다. 돌 수조에 새벽 정기를 머금은 생수의 낙수음이 경쾌하다. 절 전체에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다. 예불을 마친 비로전에는 천불상이 고요 속에 숙연하다. 천분의 부처님과 1대 1천으로 섰다. 한 분의 부처님이 한 가지씩 허물만 꾸짖어도 난… 제발에 저린 양심이 나를 뜰로 내몬다. 스님이 키 만한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다. 일찍 열반에 든 꽃들이 빗자루에 걸려 흙 속에 나뒹군다. 그가 쓸어내는 건 꽃일까, 상념일까, 아니면 불청객의 낯선 시선일까. 파적이나 할 요량으로 등산로를 물으니 그냥 손짓으로 방향만 가르킨다. 묵언(默言)수행 중이신가? 비질을 마치고는 선방(禪房)으로 들어간다. 오늘 아침 그에게 난 피안(彼岸). 나에게 그는 차안(此岸). 두 사람은 각자 앞으로 난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속리산에서 힘차게 뻗어온 백두대간 줄기는 질마재와 우두령에서 잠시 주춤하다가 황악산에서 다시 솟구친다. 황악산은 소백산맥의 허리 부분에 해당하며 경북과 충북을 가르는 분기점을 이룬다. 능선이 완만하고 몸집이 커서 우람한 육산의 느낌을 받는다. 덩치와 높이에 걸맞게 능선마다 깊은 계곡을 감추고 있다. 시원한 계류와 조화를 이루는 울창한 숲은 사계절 변화가 무쌍해 등산객들을 연중 불러 모은다. 주봉인 비로봉(1,111m)을 중심으로 운수봉·백운봉·형제봉·신선봉이 말발굽처럼 이어져 있고, 이 산등성이를 중심으로 능여계곡·운수계곡이 깃들어 있다.

◆ 민주지산·수도산·금오산 스카이 라인 아득히=직지사의 상쾌한 아침 공기를 배웅삼아 산행에 나선다. 김삿갓이 직지사 스님과 '이빨 뽑기' 내기를 하며 지었다는 '黃鶴'(황학) 싯구가 떠오른다.

황악화개학두홍(黃岳花開鶴頭紅·황악이라는데 꽃이 피어 학머리가 붉구나)

직지유중노곡하(直指由中路曲何·직지라 했는데 산중 꼬부랑길은 웬말인가)

황학과 직지가 절묘하게 배합된 시에 탄복한 스님이 그 자리에서 이를 뽑아 패배를 인정했다는 일화다. 이 시 때문인지 지금도 황악산은 황악과 황학이 혼용된다. 정식 행정 명칭은 황악산이다. 스님과 김삿갓 일화가 담긴 산길을 따라 본격 산행에 나선다. 황악산은 6개의 암자를 품고 있다. 암자들을 따라 임도가 산 중턱까지 나 있다. 포장길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참고 걸으면 활엽수림을 따라 오르는 상쾌한 등산로가 그 수고를 보상해준다.

새소리에 취해보고 싶으면 이어폰을 빼고, 들꽃과 대화하고 싶다면 일행과 멀찍이 떨어져 걸으면 된다. 사람과 멀어질수록 숲으로의 몰입이 쉬워진다. 여름 햇살 걱정도 접어두시라. 정상 부근 능선을 제외하고는 넉넉한 활엽수림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황악산은 추풍령~여시골~바람재를 잇는 백두대간의 통로. 중간중간에 양손에 스틱을 잡고 고독한 레이스를 하고 있는 산꾼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이들은 대부분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사람들이다. 운수봉에서 비로봉으로 오르는 5km 길은 완만한 코스. 8부 능선에서 주변의 산들을 조망하며 쾌적하게 걷는다. 민주지산·수도산·가야산·구미 금오산까지 스카이 라인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비로봉 근처에 있는 전망바위는 꼭 챙겨야한다. 자칫 지나치면 황악산 조망의 반은 날리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 천년고찰 직지사 곳곳엔 전설·설화=정상에서 바라보는 직지사는 무척 평온하다. 비로봉을 주봉으로 운수봉과 신선봉이 좌우에서 '지기'(地氣)를 모아 절터를 포근히 감싸는 형국이다. 정상 이르러 능여계곡·형제봉 부근 문바위 계곡은 모두 출입금지다. 상수원 보호구역이고 경사가 급해 안전사고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산은 형제봉을 지나 신선봉~망월대로 우회해서 한다. 이쪽도 급경사지역이긴 하지만 최근 김천시에서 '백두대간'행사를 준비하면서 등산로를 정비해 한층 편해졌다. 보폭에 맞춰 통나무 계단을 설치하고 돌길을 평탄하게 다졌다.

하산 길에 다시 들른 직지사는 인파로 붐볐다. 아침에 느꼈던 청량한 수도도량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직지사도 대중사찰로서 보기에 좋았다.

오고 가는 길에 절 마당을 지나는 것. 생각하기에 따라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길(路)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사람에겐 단순한 공간적 거리이겠지만, 도(道)의 한 과정으로 여기는 사람에겐 세상 먼지를 털어내고 마음을 정화하는 도량이 될 수 있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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