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정현주의 휴먼토크]휴대폰 애가

입력 2009-07-09 11:04:31

우리 연령대가 그러하듯 나는 지독한 아날로그 세대다. 디지털 세대와 과도기에서 상당한 혼란과 각고의 노력 끝에 변화돼 가는 디지털 세대에 턱걸이는 하였으나 아직도 디지털의 문명 앞에서 그리 맘이 편치는 않다. 레지던트시절 학회 발표 자료나 학위논문 작성 때 수기로 원고지 작업을 하다가 어느 날 세상은 '보석글'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문서 작성프로그램이 나와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평소 활자와 친한 나는 아날로그 문자에 대해서는 사용하는 어휘도 많고 미묘한 차이에 따라 어감을 달리 하는 단어들을 능숙히 구사하는데 컴퓨터 언어는 무미건조하고 복잡해 도무지 정이 들지 않아 친숙해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무엇보다 한 키나 명령어를 잘못 입력하면 자료가 다 날라 가는 횡포 때문에 초보 시절에는 오랫동안 낯가림과 두려움으로 컴퓨터와 지내야만 했다. 반면 동년배의 남자 선생님은 수기로는 몇 시간 걸리는 문서 작업을 단숨에 작성하고, 밤새도록 자로 길이를 재가며 만들 도표 작업을 순식간에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해 치워서 나를 부럽게 만들었다. 교수님이 논문을 교정하실 때 그 괴물의 위력은 찬란히 빛난다. 예전 같으면 부호 하나, 글자 한자 교정 때문에 몇번이고 수기로 다시 베껴야 하는 것을 키보드 몇번 두드리면 다 해결되니 그 얼마나 신통방통한 녀석인가! 그래서 그 편리성과 정확함, 신속성 때문에 나와 코드는 덜 맞지만 그 녀석과 친해지기로 결심하였다.

그러고 몇년 지나니 인터넷이라는 요지경이 나와 우리의 모든 세상습관과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이때부터는 힘들이지 않고 그 녀석을 즐기며 따라 잡았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병원시스템이 바뀌어 진료기록과 처방이 전산화하면서 종이 챠트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것도 진료역사상 메가톤급 변화이지만 지금은 익숙하고 당연시 돼 전산화되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그 불편함을 도저히 감내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러면서 휴대폰이라는 괴물도 차츰차츰 내 생활을 바꿔 놓기 시작했다. 아마 1990년대 후반에 내가 휴대폰을 처음 접했고 그 당시에는 문자 그대로 이동하는 전화기 정도로 사용했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의 개인비서가 돼 있었다. 아침에는 알람으로 깨워 주고 하루하루 나의 일정을 세세히 알려 준다. 메모장에는 모든 시시콜콜한 기억들이 내장돼 있다. 무통장입금 번호, 맛 집의 즐겨 찾는 메뉴, 아이들의 주민번호, 잘 방문하는 사이트의 비번, 친구의 생일…, 내 친구가 있는 예멘은 지금 몇 시 인지, 서울역에서 반포 가려면 지하철 몇호선을 타야 하는지, 해운대 가려면 어느 길이 가장 소통 잘 되는지 등. 내가 필요 한 것은 다 알려 주는 이 녀석이 없으면 이제는 상당히 불편하고 허전하다.

어제부터 이렇게 충성하던 내 개인비서 오렌지 휴대폰이 반란을 일으켰다. 알람이 안 울리고 문자가 안 찍힌다. 왜 그런지 모르겠고 고치려면 구입하는 만큼의 비용이 든단다. 하루하고 반나절을 고민하다가 용단을 내렸다. 이 녀석과 이별하기로 말이다. 기기를 도장한 검은 광택이 벗겨지고 자판의 선명함이 빛바랬지만 수년 동안 나에게 좋은 친구요, 충직한 비서요, 영민한 조력자였던 오렌지와의 이별 때문에 마음이 여유로운 휴일 저녁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아듀, 오렌지! 그동안 고마웠다!"

정현주(고운미피부과의원 원장) 053)253-0707 www.gounm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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