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가 오랜만에 기세등등하다. 국정원 김하늘 요원은 코믹한 첩보원으로 변신해 국제테러범을 쫓아 고군분투하고, 송강호 신부님은 오뉴월의 박쥐로 돌아와 피를 빨며 열심히 죄를 짓고 계신다. 다음주(14일)에는 한강 밤섬에 표류한 정재영이 황당한 무인도 생활을 선보인다. 개봉 예정인 '천사와 악마', '터미네이터4', '박물관은 살아있다2' 등 5월의 블록버스터들이 한국 영화와 스크린 전쟁을 준비 중이다.
이런 히트작(또는 히트 예정작)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아쉬운 영화가 있다. 김래원·엄정화 주연의 '인사동 스캔들'. 국내 최초로 고미술품의 복원과 복제를 다룬 '인사동 스캔들'은 속도감 있는 전개와 조·주연 배우들의 뚜렷한 캐릭터, 위작(僞作) 그림이 생산·유통되는 검은 시장을 현실감 있게 다뤘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사람의 마음까지 베껴라', 통쾌한 그림복제 사기극
위작 논란은 우리 미술계에서 잊힐 만하면 나오는 뉴스. 1991년 화가 천경자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를 보고 '내 그림이 아니다'고 주장하다 결국 진품으로 판명되자 붓을 꺾어버렸다. 2007년에는 박수근의 '빨래터'가 진품 논란에 휩싸였다. 경매시장 사상 최고가인 45억2천만원에 낙찰됐지만 위조 의혹을 둘러싸고 여전히 법정 공방 중이다. 위작 논란의 한가운데에는 돈이 있고, 암투가 꿈틀댄다. 수백억원의 판돈을 건 사기극의 무대로 이만한 것이 있을까. 영화 '인사동 스캔들'은 이런 미술품 위작이라는 소재를 영리하게 요리한다.
영화는 한 미술품 옥션의 경매 장면으로 시작한다. 호가가 올라가는 가운데 '가짜 그림이니 사지 마라'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가 경매 참가자들의 휴대폰에 뜬다. 수상한 귀띔을 받은 사회자는 급히 경매를 중단한다. '진짜냐, 아니냐'. 미술품 감정 40년 경력의 소장자는 진품이라고 주장하지만, 천재 복원가 이강준(김래원 분)은 조목조목 반박하며 가짜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경매는 속행된다. '열심히 그림이나 보쇼. 뚫어질 때까지'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김래원의 조소 뒤로 그림은 엄청난 가격에 낙찰된다.
도박 빚에 몰려 손이 잘릴 위기에 처한 김래원에게 국내 미술 암시장의 '큰 손' 배회장(엄정화 분)이 찾아온다. 400년 전 안견이 그렸다는 '벽안도'가 일본 교토에서 발견됐다며 작품의 복원을 맡긴다. 천문학적 액수의 그림에 걸맞은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면서. 벽안도는 세조에 의해 축출됐던 안평대군이 왕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는,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그 존재가 비밀에 붙여져야 했던 비운의 그림"으로 설정된다. 전국민과 매스컴의 관심 속에 벽안도의 발견과 복원 소식은 대대적으로 소개되고, 이강준과 배회장, 그리고 벽안도를 둘러싼 미술품 암거래상들의 두뇌 싸움이 시작된다.
'인사동 스캔들'은 범죄 사기극이라는 태생에 부끄럽지 않은 속도감 있는 이야기 전개를 보여준다. 벽안도 복원이 진행되는 가운데 인사동 최고 암거래 사장인 권마담(임하룡 분)이 끼어들고, 대한민국 최고 위작공장 '호진사' 사장(고창석 분)이 등장한다. 배회장의 계략으로 인생이 끝나버린 송태수 화백과 한국 최고의 떼쟁이 박가(손병호 분)가 등장하고, 수상한 냄새를 맡은 경찰(홍수현 분)은 미술품 암시장 추적에 나선다. 여기에 바다 건너 일본 구로다 그룹이 배회장과 짜고 벽안도의 회수에 나선다. '예술품은 누가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가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내뱉는 구로다 회장에게 한국은 여전한 식민지다.
이제 영화는 이강준이 배회장을 상대로 벌이는 복수극의 동기가 되는 강화병풍의 운명을 친절하게 소개하면서 벽안도는 과연 어떤 비밀을 가진 그림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관객을 몰고 간다. 막판 10분의 반전은 2시간 넘는 러닝타임을 헛되게 하지 않는다.
◆고미술품 위조 과정, 리얼한 묘사
'인사동 스캔들'은 고미술품 복원 과정과 위조 그림의 유통 과정을 대단히 상세하고,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강준이 '벽안도'를 빼돌리기 위해 그림을 원접과 배접으로 나누는 모습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영화에 따르면 옛 그림은 두 겹으로 된 종이에 그려졌는데, 물감이 직접 칠해진 앞면이 원접, 그 물감이 세월이 지나면서 배어나온 그림이 배접이다. 이 배접이 복원을 통해 '진품'으로 거듭나 전시관과 경매시장에 등장하고, 원접은 일본으로 유출되거나 암시장을 통해 거래된다는 얘기다.
"조선 왕실에서는 최고급의 종이를 썼어. 코팅지나 마찬가지야. 글씨가 적힌 종이라도 깨끗한 물에 씻게 되면 먹물이 빠져. 이걸 세초라고 해." 그림 위조를 위해 수백년 된 한지를 개울물에서 씻는 모습은 좀처럼 알려지지 않았던 위작의 비밀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산중 암자나 고가에서 수백년 된 먼지를 모은다. 먼지를 곱게 갈아 베낀 그림 위에 뿌린다. 여기에 약간의 공정을 가하면 '김홍도가 살아와도 제 것인지 모르는' 최고의 가짜 그림이 탄생하는 것이다. 산골 외딴 '공장'에서 가짜 그림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진품들이 암시장에서 장물로 거래되는 모습은 신기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캐릭터, 2% 부족한 반전
'인사동 스캔들'을 보면서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 '무방비 도시'가 오버랩되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양날의 칼과 같다. 능글능글하지만 천재적 두뇌와 솜씨를 가진 김래원은 박신양과 비슷하고, 엄정화는 김혜수나 손예진에 버금가는 팜므 파탈 연기를 선보인다. 개성있는 캐릭터들의 얽히고 설킨 두뇌 싸움도 전작들의 장점을 솜씨있게 따라간다. 영화는 '이건 몰랐지?'하며 관객의 뒤통수를 때릴 반전을 준비하며 속도감 있게 종국을 향해 치닫는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지 못한다. 등장 인물의 캐릭터는 어디선가 본 듯한데 그보다 못하다. 김래원은 박신양보다 어려 보이고 덜 노련해 보인다. 엄정화는 김혜수, 손예진보다 표독한 연기를 구사하지만 덜 세련됐다. 구성은 속도감은 있지만 산만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마침내 밝혀지는 김래원의 복수 동기나 막판 역전은 아쉬운 억지스러움을 남긴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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