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순신은 조선인 총에 맞아 쓰러졌다

입력 2009-04-29 06:00:00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장한식 지음/행복한 나무 펴냄

이순신 장군이 조선인의 총에 저격당해 죽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우리 대부분은 장군이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적군의 총탄에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자살설, 은둔설이 제기되었다. 이 책은 조선 군사의 저격 가능성을 제기한다.

자살설과 은둔설의 배경은 선조 임금의 질시와 경계에 있다. 전쟁이 끝나는 마당에 막강한 수군을 가진 이순신의 존재는 임금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오랜 전쟁으로 민심은 흩어졌고, 조정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 와중에 23전 23승의 눈부신 전략으로 왜적을 무찔렀으며 남해안 민심을 확실하게 얻고 있던 이순신은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장군은 명나라 수군 도독에 임명돼 종전 후 임금이 처벌하기 어려운 위치에 올라 있었다. (물론 선조 임금은 저 먼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왜적을 무찔러 민심을 얻고, 그 여세를 몰아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웠던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자살설 혹은 은둔설(정치적 자살)을 제기하는 학자들은 이순신이 선조의 두려움을 알고 있었다고 본다. 그래서 선조의 손에 자신이 제거될 것임을 짐작했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임금의 손에 죽는 대신 적군의 손에 죽음으로써 임금의 적, 즉 '역적'이 아니라 '충무공'이 되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은둔설은 장군이 전사하고 10여년이 지난 후 장군의 무덤이 이장됐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전사로 위장한 이순신이 숨어 살았으며 이장된 때가 이순신 장군이 진짜 죽은 시점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이 책의 지은이 장한식은 그러나 '이순신 자살설 혹은 은둔설'은 장군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지은이가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지금까지의 정설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지은이는 장군이 조선 조정의 음모에 의해 저격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순신 장군의 전사를 중흉적환(中胸適丸), 즉 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분은 행록(行錄)에서 무술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새벽에 공이 한창 싸움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문득 날아든 탄환에 맞았다(홀중비환(忽中飛丸)고 쓰고 있다. 이순신을 죽인 총알이 적탄임을 밝히지 않고 문득 날아든 총알이라고 쓴 것이다. 이분이 '적환'이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문제의 탄환이 일본군의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비약하면 이순신을 죽인 탄환이 아군의 것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을 맞힌 탄환은 두터운 갑옷을 뚫고 가슴에서부터 등을 완전히 관통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조총의 살상력을 감안할 때 매우 가까운 거리(예컨대 대장선 내부)에서 발사되었다는 말이다. 류성룡은 왜 굳이 적탄이 갑옷을 뚫고 상체를 완전히 관통했다고 기록한 것일까. 혹시 그의 죽음에 어떤 의혹이 있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이순신의 사망을 보고 받던 날 임금은 반응은 싸늘했다. 군문도감이 들어와 이순신의 사망을 아뢰자 선조 임금은 '알았다'고 짧게 대답했다. 조선 최고의 무훈을 세운 장수, 풍전등화 같은 왕조를 지켜낸 충신이 죽었다는 데 임금은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알았다'고 무미건조하게 답한 것이다. 어쩌면 임금은 이순신의 사망을 다른 비밀 경로를 통해 미리 보고 받았던 것은 아닐까?

이순신이 죽고 엿새가 지나자 임금은 이순신에게 극도의 호의를 표시했다. 살아있는 이순신은 두렵지만 죽은 이순신은 고마울 뿐이다. 선조는 이렇게 명했다. 이순신에게 벼슬을 추증하고 부의도 보내주고 그의 장사는 관청에서 치러 주도록 하라. 그의 아들은 몇이나 되는가? 거상 기간이 끝난 뒤에 모두 벼슬에 임명해야 할 것이다. 바닷가에다 사당을 세워 주는 것도 좋겠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이순신 장군을 죽였을까? 이 책은 조심스럽게 의혹을 제기한다.

'손문욱이라는 자는 대장선의 정규 승무원이 아니었다. 그는 그날 우연히 대장선에 올라탄 것으로 돼 있다. 노꾼이 아닌 장교급으로 대장선에 승선하는 사람들은 이순신과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해온 동지들이다. 손문욱은 어떤 경로로 마지막 해전에서 대장선에 합류한 것일까?

그는 이순신 최후의 현장에 재빨리 나타나 이순신의 사망을 확인한 다음 옆에 있던 아들과 조카들을 다독였다. 측근이 아니면 지휘탑에 있던 이순신의 사망을 눈치채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손문욱은 가장 먼저 알고 달려왔다. 사물의 형체가 흐릿하던 새벽녘, 총알이 빗발치던 전장의 한복판에서 그는 어떻게 이순신의 죽음을 금방 알았을까?

노량 해전이 끝난 후 손문욱은 가장 큰 전공을 세운 인물로 부상해 본격적인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의 출세 가도에 대해 수군 장졸들과 많은 사람들이 거짓 전공을 아뢰고 분노했지만 그의 출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지금에 와서 이순신 장군의 사망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다만 독자 개개인이 장군의 죽음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임진왜란과 조선의 역사는 달라질 수 있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인 동시에 현재에 의해 다시 씌어지는 속성이 있으니까.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한 '이순신, 죽음의 비밀'이고 다른 하나는 '수국(水國) 프로젝트'다. '수국 프로젝트'는 이순신의 승리 원동력이 '경제를 이해하는 능력'에 있다는 분석이다.

명장으로서 CEO로서 이순신은 지혜와 땀으로 '해상의 자급자족 경제체제'를 구축했다. (알다시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전쟁 동안 조선 조정은 이순신의 수군에게 '못대가리 하나'도 지원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밀려오는 왜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스스로 군사를 확보하고 무기와 병참을 확보했다. 세상에 이런 나라, 이런 전쟁은 없다.)

이순신은 한산도(정유재란 당시에는 고금도)를 중심으로 서·남해의 여러 섬과 해변에 단순한 군영이 아닌 산업 기반과 행정 능력을 갖춘 군산정(軍産政)복합체를 구축했다. 지은이는 이 군산정 복합체를 나라에 비견할 만한 체제로 보았고 그래서 '수국(水國)'이라고 이름지었다.

어쩌면 이 완전한 '수국 체제'는 조정으로부터 못 대가리 하나 지원받지 못했던 이순신의 승리의 원동력이었고 동시에 이순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저 남쪽 바다에 나라에 비견할만한 막강한 '수국'이 있으니 선조 임금은 잠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443쪽, 1만6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