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이 만난 사람] 조각가 서준영

입력 2009-03-07 06:00:00

파리를 떠나오던 날 아침, 숙소 주인과 일을 거드는 아가씨가 오래 배웅을 해 주었다. 나는 리옹역 근처 아파트의 작은 방을 파리에 있는 내내 빌려 썼는데, 숙소 주인은 길가로 난 상가에서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연변이 고향인 코제트를 닮은 아가씨는 붉어진 눈으로 계속 내 손을 쥐고 흔들었다. 차고 건조한 동풍이 거리를 휩쓸어 볼을 스치는 가을날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파리 외곽 마을들이 햇빛을 받아 저 아래에서 파랗고 노랗게 흔들렸다. '아듀! 파리, 그동안 당신의 환대에 감사 드려요.' 하지만 나는 과연 파리를 제대로 '발견'이나 하고 돌아가는 것일까.

조각가 서준영(44)씨를 만난 것은 참으로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조너선 브로프스키 등 세계적 조각가 18명의 작품과 함께 베이징올림픽 스타디움 주변 새 둥지(냐오차오) 공원에 설치된 작품 '다섯 개의 돌연변이'(5 mutations)의 작가인 그가 다른 이들을 만나는 자리에 합류한 것이었다.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작품 설치를 의뢰받은 작가는 세계 12개국의 19명으로 아시아권 작가로는 일본의 마츠오 미츠노부와 그뿐이었다. 작품을 어떻게 읽으면 되는지 물었다.

"일단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올림픽 오륜에 대한 해석이 최우선입니다. 각각의 손가락은 개별적 아이덴티티를 나타냅니다. 서로 다른 시간과 시대, 사건, 역사를 통해 변화해온 문화와 문명 그리고 자연의 정체성을 각각 재조명한다는 의미지요. 그렇게 다양성을 표현하는 각각의 손가락을 불규칙한 면과 각을 반복하는 새로운 입체개념 프렉탈 구조(flactal structure)로 재현했는데요. 이것은 치밀한 수학적 공법을 통해 마치 일상 속의 거울처럼 모든 사물을 비춰주거나 반사시켜 미로와 같은 테크놀로지와 유희성을 또 다르게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거울과 같은 표면질감을 가진 스테인리스를 주 재질로 한 작품에서는 약지(藥指)만 유독 붉은 와인 빛으로 코팅처리되어 있다. "현재와 미래의 인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동양철학에 의하면, 약지는 인간의 심장을 가리킨다고 하죠. 이는 인류의 약속이라는 아이덴티티도 동시에 가집니다. 올림픽 오륜의 가치를 이 네번째 손가락에 집중시키고자 개인적으로 의도했습니다." 개별적 존재들인 인류의 행복한 합일 또는 균형과 평등, 질서의 시메트리(좌우균제)를 표현했다는 말이다.

2009년 3월 현재 그는 또 다른 기획전을 의뢰받아 서울과 파리 그리고 베이징을 오가며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작업은 어디에서 하느냐고 물었다. "작업은 프랑스 문화부에서 제공받은 파리 남쪽의 까셩(Cachan)에 있는 아틀리에에서 주로 합니다. 집과 작업실, 정원이 함께 있는 곳이지요. 서울은 아직 따로 작업실을 두지 않고 프로젝트가 있을 때 관계자들을 만나러 오며, 그때마다 기술팀을 구성해서 작업에 착수합니다. 베이징에는 개인 에이전트가 있어 그들이 제 전시 기획을 맡고 있습니다."

그는 또 1999년 9월부터 11월까지 샹젤리제 대로변에 생존 조각가 56명의 작품을 선보인 '샹젤리제 조각전 Ⅱ'에 한국인으로 고(故) 백남준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그때 이야기를 물었다. "프랑스에서의 모든 전시회가 다 그러하지만, 작가만이 전시기획에 주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시회를 위해 프랑스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와 안토니오 스팅고 같은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이 전시 초대 작가와 개별적으로 작품 설치 장소와 안전문제, 외부 전기사용 등 디테일한 기획단계 프로세스를 가졌습니다. 저만 해도 그들과 전시회 1년 전부터 일곱번이 넘는 긴밀한 회의와 토의를 거쳤습니다. 그땐 그들과 저의 어시스턴트들과 파리시 관계자, 건축가와 평론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지요."

전시기간이 마침 우기(雨期)에 접어들 때여서, 시속 200㎞가 넘는 강풍이 불 경우에 대비하는 사안을 민감하게 논의했던 것이 특히 기억난다고 했다. "높이 7m, 길이 5m가 넘는 작품을 제작하도록 파리 근교 자동차 공장의 상당히 큰 아틀리에를 시에서 제게 제공했지요. 그곳에 건축가 안토니오 스팅고와 그의 어시스턴트 10여명이 방문을 했어요. 마치 해부라도 하듯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연필로 그리고 사진을 찍더니 내게 이 큰 구조물의 축(軸)이나 픽스 부분, 하다못해 못으로 박아야 할 부분마저 없는 것에 밤새 회의를 했는데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한국에서는 전통가옥을 지을 때 못 하나 박지 않고 나무의 홈을 파고 이어 짓는다. 그 공법이므로 같이 작품에 사용될 머리카락이나 필름도 마찬가지로 이 조형물 위에 부착되어도 전혀 탈이 없을 것이다."

건축가 안토니오 스팅고는 3개월 후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공법을 배우겠다면서 긴가민가하며 동의했다고 한다. 물론 9년이 지난 지금까지 파리 그의 작업실에는 그 작품이 아무런 탈 없이, 그것도 두발로 굳건히 서 있다. 중앙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1994년 넓은 곳에서 좀 더 새롭고 실험적인 작업을 하기 위해 유학을 왔다. 전범으로 삼고 있는 작가가 있느냐는 물음에 매일 만나고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스승이고 전범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좋은 작가에 대해서는 틀과 형식, 습관에 얽매이지 않고 일상에서 진행되는 모든 것을 마치 일기 쓰듯 기록하고 자문하는 작가가 아니겠느냐며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다시 집요하게 작품을 구상할 땐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느냐고 물었다.

"파리 작업실 2층 공간 벽면에 수많은 에스키스(습작)들이 붙여져 있습니다. 잠들기 전에도 침대에 누워 그것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수많은 영상들이 말을 걸어오거나 저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을 하게 만들지요. 그리고 산책을 하거나, 음식을 먹거나, 차를 타고 가다가도 영감을 주는 것들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어 자료로 남깁니다. 평론가들이나 관객들 또는 가족들이 제 작품에서 감성을 읽어내지만, 마치 작은 렌즈로 바라보듯 세상을 읽고 일상을 축적해 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영감의 원천일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베이징 조각설치작품은 특별한 주제와 재질이 주어진 관계로 스테인리스를 사용했지만, 작품 재료는 주로 아크릴, 슬라이드 필름, 머리카락, 조명, 프렉탈 등을 섞어서 사용한다고 했다. 새롭게 실험해볼 재료로는 유리를 꼽았다. 그는 당분간 서울에서 오래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결실을 볼 예정이다. 보내온 이전의 전시 작품 사진들에서 저절로 즐거운 일상을 꿈꾸게 하는 묘한 힘이 느껴졌다. 다시 한 번 우연하게나마 그를 만나게 해준 행운에 감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약력

1991년 중앙대학교 조소과 졸업

1994년 도불

2006년 베이징 올림픽 공원 도시 조각 기획 우수상 수상(중국, 베이징)

2000년 제1회 한·불 문화상 수상(프랑스, 파리)

◆전시 및 프로젝트

2008년 한국국제아트페어 KIAF(한국, 서울)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기념 국제 조각 초대전, 한국 대표(중국, 베이징)

2006년 베이징 올림픽 공원 도시 조각 기획전(중국, 베이징)

2002년 'Autobus 2008' 이중적인 삶, 파리/서울 동영상 버스 프로젝트, 기획 추진 중(프랑스/ 한국)

1999년 샹젤리제 국제 야외 조각 2000 초대전, 한국 대표(프랑스, 파리)

1990~2001년 개인전 및 심포지엄 단체전 다수 참가

현재 까셩 예술가 협회(la cite des artistes de Cachan), 프랑스 예술가 협회(Association de la Maison des Artistes en France ), 프랑스 조형미술 저작권 협회(ADAGP) 프로젝트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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