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불황을 이기는 힘 '아버지'

입력 2009-02-26 13:50:13

워낭소리의 두 주인공, 최원균 할아버지와 늙은 소
워낭소리의 두 주인공, 최원균 할아버지와 늙은 소

"내 무엇이 그렇게 비난받고 경멸당할 거리던가. 내 아무리 초라하고 무능했어도 아버지였고 남편이었어. 그런데 왜 날 무시하고 경원해. 나의 삶이 성공적이지 못해 그토록 부끄럽고 싫었나. 솔직히 나도 이런 내가 싫고 화났어. 하지만 비굴하고 추하기보다 그냥 이대로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작가 김정현이 1997년 출간한 화제작 '아버지'의 한 구절이다. 아버지는 출간 6개월 만에 100만 부나 팔려나가 단기간에 가장 많은 부수가 팔린 책으로 유명하다. 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앞둔 중년 남자가 그의 가족에게 보여주는 눈물겨운 사랑을 그리며 '아버지 신드롬'이란 사회적 현상까지 불러일으켰다. 세속적인 출세를 포기한 모습이 무능력으로 비치고, 말로 표현되지 않는 자식 사랑이 무관심으로 보이는 아버지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의 가족에게 보여 주는 눈물겨운 사랑이 잊지못할 감동을 줬다.

그 후 12년…. 대한민국 문화계에 다시 아버지 열풍이 불고 있다. 소설 아버지가 IMF 당시 중년 가장들의 헌신과 가족 사랑을 그리며 아버지 신드롬을 일으킨 것처럼 지금 영화·출판계 또한 유례없는 불황에도 묵묵히 인내하며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고 있다.

◆워낭소리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농부 최 노인에겐 30년을 부려온 소 한 마리가 있다. 소의 수명은 보통 15년. 그런데 이 소의 나이는 무려 마흔 살. 살아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이 소는 최 노인의 베스트 프렌드이며 최고의 농기구이고 유일한 자가용이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최 노인이지만 희미한 소의 워낭 소리도 귀신같이 듣고 한 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매일 산을 오른다. 심지어 소에게 해가 갈까 논에 농약을 치지 않는 고집쟁이다. 소 역시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최 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산 같은 나뭇짐도 마다 않고 나른다. 무뚝뚝한 노인과 무덤덤한 소. 둘은 모두가 인정하는 환상의 친구다. 그러던 어느 봄 최 노인은 수의사에게 소가 올 해를 넘길 수 없을 거라는 선고를 듣는데….'

관객 100만명을 돌파하며 한국 독립영화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워낭(소의 목 밑에 다는 방울)소리의 줄거리다. 경북 봉화 상운면 산골마을에 살고 있는 영화 속 주인공 최원균 할아버지에 대한 관심 역시 폭발적이지만 세간의 '호들갑'이 부담스러운 할아버지는 모든 인터뷰를 사양하고 있다.

영화 워낭소리와 주인공 최 할아버지에 대한 폭발점 관심은 '아버지'라는 감성 코드가 현실의 '불황'과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관객들은 평생 자기 고집대로 우직하고 느리게 농사를 짓고 있는 최 할아버지와 그와 40년을 함께 죽도록 일만 한 늙은 소에게서 '나의 아버지'를 보며 복받쳐 오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또 고단하고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 일에 충실한 노인과 소의 모습에서 항상 인내하고 헌신했던 내 아버지를 떠올리며 지금의 불황을 헤쳐나갈 용기와 희망을 얻는다.

이와 관련, 15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워낭소리를 관람해 눈길을 끈 이명박 대통령은 영화 속 주인공 최 할아버지에 대해 "농사를 지으며 자녀 9명을 공부시키고 키운 게 우리가 발전할 수 있던 원동력이 아니었겠냐"며 "교육을 통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으려 했던 것이 우리의 저력이 됐고 외국인도 이에 놀라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영화를 만든 이충렬 감독 역시 1999년 IMF 당시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를 대변해 줄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이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그 소가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바로 소"라며 "우울한 시대에 아버지를 소재로 다큐를 만들었던 것이 관객들에게 사랑받아 흥행한 것 같다"고 말했다.

◆출판계

아버지 열풍이 불기는 출판계 또한 마찬가지다. 지난해 작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베스트 셀러에 오른 데 이어 아버지를 재조명한 소설들이 연초부터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

▷송아지 아버지(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 사람)

"그날 처음으로 금희는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금희의 눈에 아버지는 초라하고 무식한 농사꾼일 뿐이었다. 친구의 아버지처럼 수의사도, 철도 기관사도 아니었고 장학사도 사장도 아니었다. 그 날 아무도 모르게 금희는 마음 속에서 아버지를 지워버렸다. (중략) 그때까지 금희는 자신을 키운 것은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금희는 이제야 무지했던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스승이었던가를 깨닫고 있었다. 아버지는 온몸으로,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금희를 가르친 것이다. 어리석은 딸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8년 만에야 그것을 깨우친 것이다. 금희는 가만히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아버지!" (에피소드2 송아지 아버지 중에서)

'송아지 아버지'는 소설가 윤지강의 첫 산문집이다. 사회에선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고 가정에선 책임과 의무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족들 사이에서조차 외톨이인, 그래서 더 고독한 이 시대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는 요즘같은 상실의 시대에 무뚝뚝함 속에 외로움과 진한 자식사랑을 숨기고 살아가는 우리 아버지들의 사연을 취재해 특유의 감성으로 풀어낸다. 이 책은 18편의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담고 있으며 우리 삶을 따뜻하게 해줄 용기와 희망, 사랑과 위로 등 삶의 귀중한 가치들을 전편에 걸쳐 말한다.

▷고향사진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아버지가 되는 그 순간부터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로서의 행위가 된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형제로서, 또는 자식으로서 하는 행위일지라도 그것은 고스란히 아버지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프롤로그 중에서)

'고향사진관'은 10년 전 '아버지' 신드롬을 일으켰던 작가 김정현이 대한민국에서 아들로, 아버지로, 가장으로 산다는 것을 그린 신작이다. 작가의 실제 친구를 모델로 한 실화 소설이라는 점도 특이하다. 주인공 용준은 스물다섯의 나이에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의 짐을 떠안지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아버지와 가족들을 돌본다. 복학도 포기하고 청춘과 인생을 접은 채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고향사진관을 지키는 주인공의 모습은 각박해져만 가는 세상 속에서 진정한 효와 가족의 의미를 되새시게 한다. 이 책은 지난해 12월 발간한 후 2개월 만에 1만5000부를 판매했고 4쇄에 돌입했다.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