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밤에 장롱을 정리하면

입력 2009-02-19 06:00:00

내가 어릴 적에는 밤이면 장롱문을 마음대로 열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밤에 장롱을 정리하면 재수 없는 일이 생긴다면서 단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를 그때는 당연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나는 자라서 새색시가 되었고 아이들도 태어났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에는 장 정리를 하는 게 낮보다는 밤이 좋았다. 종일 법석이던 아이들이 잠든 후에 잘 마른 빨래를 접어 차곡차곡 서랍장에 넣었다. 그 즈음엔 벌써 할머니의 말씀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한 친구가 그 말을 다시 생각나게 했다. 밤에 서랍장을 열어놓고 옷 정리를 하는 모습을 본 이웃 친구는 "야반도주(夜半逃走)할 사람처럼 왜 밤에 그래?" 전해줄 물건이 있어 잠시 왔다는 친구는 농담조의 말을 던졌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표정으로 크게 웃었지만 그날 다시 나의 할머니가 떠올랐다. 어릴 때는 야속하기만 하던 할머니를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밤에 장롱을 뒤지는 여자는 오해받기 쉽다. 오해는 언제나 상대가 나를 잘못 알았기 때문에 생긴다. 상대가 나를 잘못 알기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 누명 때문에 죽기도 한다. 인생은 원래 억울함의 연속이다. 약자는 늘 억울하기 마련이다. 억울하다는 의미는 목숨을 잃는 일만이 아니라 평판이 나빠지는 일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평판은 인격이고 인격이 일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오늘날처럼 교통이 좋고 자동차가 흔한 세상에 살지 않았다. 길을 떠나려면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야 하므로 전날 낮에 모든 준비를 해두는 게 원칙이었다. 또 지금처럼 어둠을 빼앗긴 세상이 아니라 어둠을 이겨야 하는 환경이었으므로 중요하고 좋은 일을 밤에 하지 않았다. 그러니 밤중에 장롱을 뒤지는 여자는 누군가와 눈이 맞아 도망갈 사람으로 소문나기 쉬웠던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타인의 입장을 모르면서 자기 기준으로 말하고 행동하여 상대를 곤경에 빠트린다. 누구나 모르고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지만 그 때문에 한 사람의 삶이 부서지기도 한다. 밤에 장롱을 정리하지 말라는 말은, 억울한 소문으로 인해 평판이 깎이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라는 가르침이다. 평판은, 간혹 나의 그림자만 본 상대가 만들어내는 허상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실상이 되어 나의 발목을 잡는다. 그림자를 드리운 실체가 나의 것이라는 무서운 책임 때문이다.

신복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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