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식장에는 해마다 이색 졸업생들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올해도 그렇다. 19년 만에 학사모를 쓴 만학도부터 '장애인의 수호신 아줌마' 졸업생까지…. 그들의 졸업식 속으로 들어가본다.
◆끈기가 준 선물
올해 경일대를 졸업하는 황병기(62)씨는 19년 만에 학사모를 쓰게 됐다. 황씨는 1990년 이 대학 섬유패션학과에 입학했으나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의 경영위기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가정형편 때문에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대학 공부인데, 또다시 시련으로 접어야 한다는 현실이 당시에는 너무 서러웠지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회사를 지켜낸 그는 15년 만인 2005년 수능 시험을 쳐 다시 재입학했다. 황씨는 "어떻게 들어간 대학인데 제대로 공부도 못해보고 돌아설 수밖에 없어 마음이 찢어질 정도로 아팠다"며 "회사가 좀 나아지면서 지금 다시 도전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재입학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경북대 생명식품공학부를 졸업하는 박철홍(30)씨는 남들보다 늦은 26세의 나이에 대학에 들어왔지만 졸업은 7학기 만에 했다. 졸업을 서두른 건 아버지 때문. 대학에 입학한 그가 대학 생활의 낭만을 만끽하려는 순간 아버지가 쓰러졌다.
몸이 불편한 동생과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어머니 대신 박씨는 병간호를 떠맡아야 했다. 학교는 한 학기만 겨우 다니고 휴학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대학 공부인데 무작정 허송세월할 수는 없었어요. 동생에게 아버지 병간호를 부탁하고 조금이라도 일찍 졸업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덕분에 7학기 만에 졸업할 수 있게 됐어요."
박씨는 아버지 병간호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책에 매달렸다. 전학기 전액 장학생이었다. 2학년 때는 '스트레스에 의해 유발된 위궤양에 끼치는 천마의 효능'이라는 제목의 논문 주저자로 SCI급 저널에 게재하기까지 했다.
공부에 재미를 붙인 그는 대학원 진학을 하고 싶다고 했다. 아직도 누워 있는 아버지를 위해서다. "몸이 편찮으신 아버지께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욕심에 열심히 공부합니다."
◆형제, 부부 졸업생
20일 영진전문대학을 졸업하는 이남국(27)·남협(25)씨 형제는 취업을 위해 다니던 대학을 그만뒀다. 형은 지역의 한 4년제 대학을, 동생은 인근 전문대학에 다니다 취업이 잘되는 전공을 찾아 영진전문대학을 선택한 것이다.
형은 "집안 형편도 넉넉지 않아 빨리 취직할 수 있는 전공을 찾아 학교를 갈아탔는데, 동생도 함께 따랐다"고 했다. "경기에 영향을 많이 받지 않고, 전망도 밝은 분야가 뭔가 고민했어요. 그러다 기계설계 분야를 선택했지요." 형과 동생은 2007년 이 대학 컴퓨터응용기계계열에 나란히 편입했다.
이들의 생각은 2년 뒤 현실로 이어졌다. 동생은 지난해 1월 두산엔진 우수인재 우선채용면접에 합격해 9월부터 출근을 시작했으며, 형도 지난해 9월 대우조선에 입사했다. 이남국씨는 "동생이 함께 있어 자극이 되면서 공부를 더 열심히 한 것 같다"며 "하고 싶은 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라면 남을 의식하지 말고 진로를 선택해 보라"고 권했다.
대구과학대학 과 커플인 정영주(46)·권영미(42·여)씨는 실제로 부부 사이다. 지난 1990년 결혼한 이들은 "평생 학사모 한번 써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했다. 고교 졸업 후 25년 만에 책을 든 이들 부부는 2007년 대구과학대학 부동산과에 나란히 합격했다.
남편은 "합격 통지를 함께 받고 너무 기뻤다. 졸업을 한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부인은 "꿈에 그리던 대학에 진학해 남편과 함께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이 즐겁고 신났었다. 무엇보다 부부가 나란히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졸업하게 돼 평생 동반자이자 동기가 된 것이 너무 기쁘다"고 즐거워 했다.
이들 부부는 "방학인 것 같은데 벌써 졸업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며 "앞으로 4년제 대학에 편입해 공부를 계속할 계획"이라며 손을 잡았다.
◆봉사가 천직이지요
박건옥(53·여)씨 가족은 올해부터 모두 대구대 출신이 됐다. 올해 박씨와 막내아들이 졸업하기 때문이다. 남편과 큰아들은 이미 이 대학을 졸업한 선배들이다.
박씨는 1992년부터 지역의 홀몸어르신과 노약자를 위한 다양한 봉사활동을 틈틈이 했다. 그러다 이들 소외계층을 위한 실질적인 복지사업과 사회사업 등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문을 두드렸다.
늦게 시작한 공부였지만 학교 동문인 가족의 격려와 적극적인 지원이 많은 힘이 됐다. 남편은 대학 선배로 적극적인 후원자가 됐으며, 같은 과를 졸업하고 어린이재단에 취직한 큰아들은 집안일을 대신해줬으며, 함께 대학생활을 시작한 막내아들은 친구이자 경쟁자가 됐다.
박씨는 학과 공부에도 충실했지만 그동안 해오던 다양한 봉사활동과 복지사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공로로 국무총리상과 보건복지가족부장관상 등을 받기도 했다. "가족들의 힘이 큰 보탬이 됐어요. 그런데 공부를 해보니 공부에 대한 욕심이 더 생겨요. 대학원에서 복지정책과 복지사업에 대해 공부한 후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재활사업과 복지사업을 소신껏 해보고 싶어요."
영남이공대학 사회복지보육계열 졸업생인 배춘자(64·여)씨는 10년 전부터 봉사활동 재미에 푹 빠져 대학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1주일에 5일가량은 봉사활동을 한다. 동네에서는 홀몸어르신과 장애인들의 수호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배씨는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천마향기'라는 봉사 동아리를 만들었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동아리이지만 이미 학교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동아리가 됐다. 홀몸어르신 칠순 잔치 열어주기, 온천 목욕여행 보내기, 무료급식 봉사, 장애우 돌보기 등 동아리 회원들은 시간이 아쉬울 정도다.
"그동안 8남매를 키워 모두 출가시켜 보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 자신을 위해 한 것이 너무 없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배씨는 "벌써 졸업했다는 게 아쉬워 4년제 대학에 편입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정욱진기자 pencho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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