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쿨'하지 못한 것들

입력 2009-01-29 07:55:10

조선 선비는 구질구질하지 않았다. 잘못은 곧바로 인정하고 상대가 옳으면 두말없이 승복할 줄 알았다. 나가고 들어감이 깔끔한 처신이었다. 어려서부터 자신부터 갈고 닦은 수양 덕이다. 조선 지식인은 그런 인격체를 완성한 연후에야 세상에 서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修己治人(수기치인)의 선비정신이다. 벼슬을 잃어도 맨 먼저 하는 일이 낙향하여 다시 수기 공부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그런 정신이 지배하고 또 그것을 높이 떠받든 조선사회였기에 500년 지속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게 '쿨'했던 정신풍조는 다 어디로 갔는가. 어디를 둘러봐도 산뜻한 구석이 하나 없다. 개차반 같은 국회, 웃기는 미네르바 소동을 보면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너저분해졌나 싶다. 자기들 배짱과 맞지 않으면 뒤집어엎을 생각부터 먼저 하고 도무지 게임의 승패나 잘못은 인정하려 드는 법이 없다. 아닌 말로 가면이 벗겨졌다면 미네르바를 대놓고 찬양했던 사람들은 얼굴을 처박는 게 정상이다. 근본 없는 문외한의 골방 헛소리를 '미네르바 가라사대' 하며 떠받쳤던 정치인 경제학자 좌파논객 언론들은 쥐구멍을 찾아도 시원찮은 것이다. 이치가 그러함에도 수치스러워하기는커녕 요리조리 말을 돌려가며 빠져나갈 구실을 찾느라 더 왕왕대고 있는 요즘이다.

미네르바를 '국민의 경제 스승'이라고 거품 물었던 경제학자는 왜 꿀 먹은 벙어리인가. 청와대 경제수석까지 지낸 중량감으로 혹세무민에 힘을 보탠 것이 결코 가볍다 할 수 없을진대 여태껏 그가 사과했다는 소식은 없다. "논리적이고 정확하다. 미네르바 한 수에 정부는 귀 기울여야 한다"고 떠든 공중파TV 또한 마찬가지다. 낯뜨거운 방송 실수에 대해 한마디도 않은 채 미네르바 구속의 부당성 문제로 국면을 바꾸려고 갖은 용을 쓸 뿐이다. 또 어떤 매체는 '우리가 다룬 미네르바는 그 미네르바가 아니다'며 꽁무니를 빼기 바쁘다. 언론도 잘못 판단할 수 있다. 그럴 때는 구질구질하게 군말 않는 게 옳다. 앞뒤 잴 것 없이 고개 숙이는 정면돌파가 사는 길이다. 실수를 뭉개버리겠다고 잔머리 굴려봐야 속아 넘어가는 세상이 아니다. 공연히 대중의 불신만 확대하는 우매한 판단이다.

미네르바 우상 만들기에 광분한 천박한 지적 풍토는 기어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멋모르고 추종했든 정부를 까는 재미에 편승했든 따질 것 없다. 그런 자기반성의 계단을 건너뛰어서는 우리 사회가 또 어떤 허깨비에 놀아날지 모르는 것이다. 이건 표현의 자유라든가, 미네르바 구속 문제와는 아주 다른 차원의 얘기다.

지난 한 해를 엉망으로 만든 촛불시위나, 난장판 국회 역시 배후에는 불복의 습성이 작동하고 있다. 촛불시위가 처음과 나중이 달랐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다. 결국은 대선 불복종 투쟁이라는 한 원로작가의 지적은 핵심을 찌른 것이다. 폭력 국회도 따지고 보면 그 본색은 이명박 정부와 여소야대에 대한 원천 부정이 배경인 것이다. 야당은 말끝마다 소수의 한계를 내세우지만 일단은 그러한 의석 분포를 존중하라는 게 지난 총선의 명령이다. 그런데도 다수여당에 말로는 맞서기 어렵다며 주먹부터 내지르는 것은 국민의 선택을 정면으로 묵살하는 것이다.

5석짜리 미니정당이 자기들 구미에 맞지 않는 입법이라고 국회 전체를 깽판 놓는 패악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결국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정당이 오케이하는 법안을 만들자는 건데, 이념과 노선이 다를 수밖에 없는 정당정치에서 있을 수 없는 발상인 것이다. 만장일치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정권을 잃은 제1야당 또한 지난 1년은 저항하는 파르티잔의 잔병 같은 모습이었다. 선거에서 졌으면 깔끔하게 퇴장하는 게 도리이건만 건건이 자기들 이념을 우격다짐하며 새 정부 앞길을 가로막았다.

불온한 시대처럼 민의를 조작한 선거였다면 얘기는 또 다를 수 있다. 이런 불복의 습성에는 얼룩진 정치사가 뒤에서 거들고 있다. 지금의 집권여당 역시 상대를 인정 않는 지저분한 선거 뒤끝에서는 오십보백보인 것이다. 야당시절 국회를 점거 농성한 전력이 한두 번 아니며, 대선 후보경선 승복을 두고두고 유세 떠는 게 한나라당 내 세력다툼의 몰골이다. 이런 집권당의 어제와 오늘이 개판 정치에 빌미를 주고 있는 것이다. 가뜩이나 심란한 시대에 스포츠맨십의 반만이라도 닮은 구석들을 봤으면 좋겠다.

김성규 논설실장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