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독립운동가' 우재룡 선생 아들 우대현씨

입력 2009-01-14 10:12:27

"옥살이 16년… 60세 돼서야 저를 낳았지요"

▲우대현씨가 11세 때 여읜 아버지의 초상화를 쓰다듬으며 아버지를 회상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우대현씨가 11세 때 여읜 아버지의 초상화를 쓰다듬으며 아버지를 회상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반세기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조명이 활발하게 이뤄져 아들로서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11세 때 여읜 아버지의 초상화를 정성스럽게 쓰다듬으며 눈시울이 붉어진 우대현(66·조일주택건설 대표)씨. 그의 아버지는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200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우재룡(禹在龍·1884~1955) 선생이다. 우씨는 "철없던 어린 시절엔 단칸방에 살고, 고학을 해야 하는 등 생활이 어려워 재산을 다 털어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를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다"며 "그러나 20대 이후부터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다"고 말했다.

광복회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우재룡 선생에 대한 연구 및 재조명 움직임이 최근 활발하다. 독립운동가 선정과 함께 독립기념관은 선생이 친필로 기술한 광복회 내력 등 자료 14점을 선보이는 전시회를 이달 말까지 열고 있다. 16일 서울 독립관 무궁화홀에서는 '우재룡 선생 공훈선양학술강연회'가 열리며, 6월에는 선생의 평전도 출간될 예정. 대구 두류공원에 선생의 동상을 건립하기 위한 움직임도 분주하다.

경남 창녕 출신으로 1902년 대구부 진위대에 입대한 선생은 군대가 해산되자 청송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 1908년 체포돼 '내란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911년 옥고에서 풀려나 박상진과 함께 광복회를 결성하고, 광복회 본부의 지휘장이자 국외 연락책임자로서 중국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한 혁명기지 건설에 힘썼으며, 군자금 모집을 위해 경주에서 세금을 운송하는 우편마차를 공격해 8천700원을 탈취하기도 했다. 1920년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으던 중 일제에 붙잡혀 1922년부터 1937년까지 16년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55년 대구에서 서거했고,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우씨는 "원산형무소에서 16년이나 옥살이를 하느라 아버지가 출옥 후 60세에 저를 낳을 정도로 독립운동에 몸과 마음을 바치셨다"고 했다. "항상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와 안경을 쓴 아버지의 모습이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르지요. '친구는 죽음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이란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그리워 3년 전 우씨는 대구에서 활동 중인 화가 배종호(60)씨에게 요청, 아버지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우씨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독립운동가 후손은 고초를 많이 겪었다"며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차원에서 독립지사에 대한 연구와 재조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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