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한 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호질기의(護疾忌醫)'가 뽑혔다. 이것은 '병을 숨기면서 의사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뜻인데 중국 북송시대 유학자 주돈이가 통서(通書)에서 '요즘 사람들은 잘못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바로잡아 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병을 감싸 안아 숨기면서 의원을 피해 자신의 몸을 망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아마도 이 사자성어가 뽑힌 것은 요즘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의 행태를 비판하는 민의(民意)가 반영된 것이겠지만 정치는 나의 소관이 아니다.
내가 '호질기의'라는 말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은유가 아닌, 이 글귀 그대로의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데 있다. 환자를 보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검사나 치료를 미루다가 병을 키워 오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안타까움을 넘어 화가 나기도 한다. 실제로 외래에서 수술 시기를 놓친 환자에게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도대체 작년에 내가 수술하자고 했을 때 왜 안했습니까?"라고 화를 냈다가 민원이 제기된 적도 있었다.
모든 병의 치료에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 그것은 좋은 병원, 좋은 의사를 만나는 것보다 백배, 천배 더 효과적인 것이 일찍 발견하고, 일찍 치료하는 것이라는 진리다. 이 말에 반론을 제기할 의사는 적어도 이 지구상에는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다는 위암도 1기에만 발견해 수술하면 90% 이상 완치가 된다. 의학에서 소심하게 말하는 90% 이상이란 수치는 시장판에서의 말로 바꾸면 '대부분 다 낫는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실 많은 수의 조기 발견은 증상이 없을 때 건강검진을 통해 우연히 발견한 경우다. 건강검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야말로 전 세계에서 가장 병원의 문턱이 낮은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위암의 진단에 가장 좋다는, 우리나라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받을 수 있는 위 내시경의 예를 들어보자. 미국은 단순 내시경 수가만 해도 100만원이 넘고 보험회사의 압력 때문에 환자가 원한다고 해 주지도 않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책임진다는 유럽의 복지국가들 역시 환자가 원한다고 해 주지도 않지만, 하더라도 응급상황이 아닌 경우에는 몇 달 또는 반 년 후에나 가능하다. 그래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에서는 '죽고 나서야 순서가 돌아온다'는 농담들을 한다.
이렇게 병원 문턱이 낮은 의료선진국 우리나라에서 생긴 참으로 황당한 일도 있다. 어제 부산에 있는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우리 집 옆에 사는 칠십이 훌쩍 넘은 어머님이 길에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머리를 크게 부딪쳤다고 일러준다. 그러면서 오빠한테는 비밀로 하라고 하시더란다. 왜냐하면 내가 알면 당장 병원에 모시고 가서 검사하자고 할까봐서란다. 등잔 밑이 가장 어둡다.
정호영 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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