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發 신용위기에 '샐러리맨 가계위기'

입력 2008-09-23 09:47:40

"IMF때 만큼 살기 힘들다"

미국발 금융불안이 국내 일반 샐러리맨들의 재산을 거덜내고 있다. 주가는 떨어지고, 아파트를 사려고 빌린 은행대출 이자는 매일 같이 오르고, 빚내 분양받은 아파트의 마이너스 프리미엄(분양가 이하) 액수는 커지기만 하고…. 도시 근로자 가계가 총체적 위기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전 재산이 집 한 채'인 현실에서 이자부담 가중은 밤잠까지 설치게 한다. 정부가 "9월 외환위기는 없다"고 큰소리쳤지만 "외환위기 대신 가계위기가 왔다"는 아우성이다. 봉급생활자들은 IMF 구제금융 체제 당시의 슬픈 자화상이 10년만에 다시 나타났다며 자괴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흔들리는 샐러리맨 사회

포항공단 한 업체에 근무하는 L(46) 부장은 지난해 퇴직금을 중간 정산받아 당시 유행했던 중국펀드에 투자했다. 다른 주식에도 손을 댔지만 18개월만에 원금의 70% 이상을 날리고 최근 증시에서 철수했다. 그는 "직장생활 20년에 남은 것이 이것 뿐"이라며 잔액이 3천여만원 찍힌 통장을 펼쳐 보였다.

19일 낮 포항시내 한 은행지점. 근무복을 입은 공단 근로자들이 심심찮게 들락거렸다. 은행 직원은 "대부분 신규대출 또는 대출연장 때문에 오는데, 주식으로 본전 날리고 자녀 학자금 등 가계운영 자금이 달려서 온다는게 공통점"이라고 했다.

또 일선 기업체에서는 근무시간 개인업무를 이유로 한 자리이탈 등에 대한 근태관리에 나서고, 퇴직금 중간정산 신청자의 경우 개별면담을 통해 사정을 알아보는 등 '직원들의 신변관리'를 강화하거나 사생활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회사측의 이러한 직원 사생활 단속은 IMF 외환위기 사태 여파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던 이후 10년만에 다시 나타난 현상. 한 대기업 이사 L씨는 "8월 이후 퇴직금 중간정산을 신청하는 직원들이 크게 늘었는데, 다른 여유자금이 몽땅 집이나 증시에 묶여 버렸기 때문"이라며 분위기를 전했다.

구미국가공단 내 대기업체의 간부사원 P(48)씨도 알뜰히 모아온 종자돈을 외국펀드와 주식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봤다. 그는 줄어든 종자돈을 만회하기 위해 대출과 퇴직금 중간정산 등을 고심 중이다. 구미지역 금융가에 따르면 구미공단에는 P씨 처럼 종자돈이 증시 등에 묶여 버린 직장인들이 상당수여서 대출 등 상담이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눈물의 역 프리미엄

포항에는 갓 입주를 시작했거나 조만간 입주해야할 새 아파트가 수천세대이다. 하지만 입주를 미룬채 비어 있는 집이 상당수이고, 매물로 나온 것은 그보다 더 많다. 포항 남구의 한 신설아파트 경비원은 "사람이 사는 집보다 빈 집이 훨씬 많다"고 했다.

문제는 매물로 나온 아파트. 융자로 분양받았다 이자부담이 커지자, 손해보더라도 최단 시일내 팔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 포항의 한 대단지 아파트 중도금 대출 전담 은행의 지점장은 "30평형대는 3천만원, 40평형대는 4천만원의 마이너스 프리미엄이 기본인데, 이 마저 거래가 없어 이자 회수 조차 쉽지 않다"고 했다.

게다가 일부 아파트의 경우 당초 중도금 대출을 맡기로 했던 은행측이 대출이자를 대폭 인상하는 방법으로 사실상 거래중단을 선언, 매물로 나오는 새 아파트 숫자는 늘고 덩달아 거래가는 더욱 떨어지는 추세다. 한 부동산 중개인은 "매물은 폭증하는데 사려는 사람은 없고, 호가와 실거래가 격차는 더 크게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포항상의 관계자는 "봉급생활자들이 몇 천만원의 차익이라도 남겨 보려고 빚 내서 아파트에 투자했다가 오히려 몇달만에 수천만원 날리는 것이 예사"라고 분석했다. 올들어 분양한 아파트의 계약해지 사태가 줄을 잇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구미지역도 지난해부터 미분양 아파트가 급격히 늘어 23일 현재 3천800여가구에 달하면서 1천만원대의 마이너스 프리미엄이 붙어 매물로 나온 아파트가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특히 재테크 목적으로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분양 받은 직장인들은 프리미엄도 붙지 않고 매물로 내 놓아도 팔리지 않은데다 이자부담은 날로 늘어나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대출을 받아 아파트와 증시 등에 투자한 직장인들이 이자부담 때문에 허리가 휘면서 소비마저 위축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갈 곳 없는 남은 자금 어디로

주식과 아파트에 묻었던 돈을 손해를 보더라도 팔고 나온 뒤 남은 돈은 어디로 갈까. 최근 금융위기 사태 이후 소액이지만 개인들이 보유한 은행 보통예금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갈 곳을 정하지 못해 당분간 일단 두고 보자는 심리때문이라고 금융계의 분석이다.

아파트 담보대출이나 신용대출을 제한한 은행들도 잉여자금을 금고에 쌓아두고 있다. 총체적인 불안정국에서 갈곳을 잃은 돈이 은행 주변에서만 돌면서 오히려 시중 자금사정을 더욱 막히게 하고 있다는 시각도 많다. 포스코의 한 간부는 "투자하면 본전 잃고, 투자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쳐지는 개념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며 "사회 분위기나 자신의 심리상태나 10년 전 외환위기 사태 때와 너무 닮았다"고 말했다.

구미·이창희기자 lch888@msnet.co.kr 포항·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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