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문학적 서사가 아닌 엇비슷한 감동 준 이야기들
20세기 초 프로이트의 등장과 뒤이은 라캉의 대두는 문학평론가로 하여금 문학을 구조하고 있는 언어 그 자체의 분석에 몰두하게 하는 풍조를 낳았다. 소설가나 시인이 특정한 단어를 어떤 맥락 속에 배치하느냐 하는 것은 분명 작가의 무의식적인 코드를 어떤 형태로든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로 이들에게 있어 문학의 분석은 CSI 대원들이 현장의 지문을 스카치테이프 속에 봉인하는 식의 범죄 수사 방법론과 거의 흡사하다. 길 그리썸 반장이 증거의 수집으로 범죄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말하듯, 라캉파 학자들은 텍스트의 면밀한 분석으로 작가의 무의식을 엿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문학을 향한 저런 식의 접근은 골치 아프고 지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평범한 우리는 문학을 정확한 문장이나 논리적인 플롯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면 우리가 봤던 소설이나 시는 우리에게 그냥 '스토리'나 '이미지' 정도로 남겨져 있다. 나는 자기에게 총구를 겨냥하고 있는 남자가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한 아줌마의 위기를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이념 싸움에 버려진 한 인간의 처절함만 강렬하게 떠오를 뿐 그 아줌마의 선택과 생사의 여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니 이청준이 그 장면을 어떤 문장으로 조합했었는지의 문제는 지금에 와서 내게 그다지 중요한 질문이 되질 못한다.
나아가 우리는 텍스트를 통한 접근만으로 문학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아마 우리 중 다수는 '서희'나 '조준구'가 누구인지 몰랐을 것이고, 또한 애비에 의해 봉사로 만들어졌던 한 소리꾼 여인의 기구한 삶 또한 좀처럼 몰랐을 것이다. 박경리나 이청준이 평범한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은 금관문화훈장에 빛나는 미학과 그것을 지탱하는 정교한 글자의 배열만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마치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었던 것만 같은 재미있고 사실적인 '이야기'들을 남겼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그것을 어떠한 매체로 접했던들 엇비슷한 감동을 남겨줬을 훌륭한 우리 삶의 재현이었다.
아이를 잃은 전도연의 절규를 떠올릴 때마다, 우리는 누구나 '밀양'(원제 : 벌레이야기)의 딜레마를 되새김질한다. '토지'를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길상이와 헤어지게 된 봉선이의 애틋한 마음을 아련하게 느낀다. 한국인에게 이러한 내러티브는 이미 하나의 의사한 역사가 되어서 우리는 누구에게나 '그래서 봉선이가 결국 아편쟁이가 됐다죠? 쯧쯧.' 이렇게 말을 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위대한 두 작가의 슬픈 영전 앞에서 '한 줄로 읽는 한 권'의 콘셉트와 자크 라캉은 잠시 접어둬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죽어서 이만큼을 남겼다면, 굳이 작품을 한 줄 베껴놓지 않더라도 무슨 여망 따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우리 가슴 속에 남겨 주려 했던 것은 단어와 문장 나부랭이만이 아닐진대, 그 유품의 글자 하나하나에 스카치테이프를 바르지 않은들 무슨 큰 불경이 또한 되겠는가.
박지형 (자유 기고가)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우리 아기가 태어났어요]신세계병원 덕담
"하루 32톤 사용"…윤 전 대통령 관저 수돗물 논란, 진실은?
'이재명 선거법' 전원합의체, 이례적 속도에…민주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