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詩·그림을 만나다] 배트맨

입력 2008-08-23 06:00:00

서양 화투 트럼프는 모두 5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이아몬드, 클로버, 하트, 스페이드 등 4개의 무늬가 그려진 카드 13장씩 네 벌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 한 장 더 추가된다. 어느 무늬에도 속하지 않는 광대 문양의 카드다.

가장 센 패가 되기도 하고, 다른 패 대신으로 쓸 수도 있다. 무소속으로 무법, 무적의 패. 바로 조커다.

고담시의 밤을 주무르는 악의 황제 조커가 바로 그런 존재다. 그는 카드패처럼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범죄에는 목적이 있기 마련. 그러나 그는 돈도, 여자도, 권력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쾌락을 위해 범죄를 저지른다.

조커는 한때 배트맨과 싸우다 약품 속에 빠져 간신히 살아나 배트맨과는 숙적이 된다. 약품 속에 빠져 창백한 흰 얼굴에 머리칼은 초록색이고 입술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것처럼 붉다.

안면신경이 일그러져 늘 웃고 있는 광대의 얼굴이다.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고, 울어도 우는 것이 아닌 정신분열증상이 있는 캐릭터이다. 평소에도 비범한 캐릭터였던 천재적 연기자 잭 니콜슨에게 제격이었다. 이성도 없고, 규칙도 없고, 감정마저 일그러진 조커를 뒤틀린 유머로 승화시켰다.

팀 버튼이 만든 '배트맨'의 전편에 해당하는 '다크 나이트'가 현재 개봉돼 대히트를 치고 있다. 고뇌하는 햄릿형 배트맨과 절대악인 조커의 대결 구도를 통해 선과 악의 태생적 한계와 의문을 묵직하게 그려내고 있다.

광대의 웃음은 우스꽝스런 허수아비의 몸짓처럼 늘 우울한 단상을 준다. 조커도 양쪽 입이 찢어져 늘 웃는 얼굴이지만, 찢어지는 고통을 내면에 담고 있다.

화가 박철호는 "왜 그렇게 진지해?"라는 제목을 조커를 전면에 배치했다. 정작 주인공인 배트맨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배트맨의 로고만 집어삼킬 듯 도시를 물로 채우고 있다. 푸른색은 그래도 배트맨의 선함을 순수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다.

'왜 그렇게 진지해?'라는 말은 조커가 세상을 향해 뿜는 일갈이다. 세상은 뒤죽박죽, 흥청망청인데 그 고담을 구하려고 나서는 배트맨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진지함에 대한 비판이다. 자본주의의 화신 재벌 2세가 밤마다 꿈꾸는 영웅놀음, 선함을 포장하고 있지만 정작 하는 짓은 폭력적인 배트맨의 행태를 단적으로 비꼬는 말이다.

화가는 영화와 달리 조커를 좀 더 사악한 느낌으로 그려냈다. 고담시의 미래가 밝지 않을 것이라는 예견일까.

시인 류인서는 '황사'라는 시로 고담시의 숨 막히는 흉흉함을 그려내고 있다.

해를 가린 황사는 혼란스럽다. 태양은 혼절하고, 사람들은 갈피없이 창을 닫고 방방마다 등을 켠다. 밤인가 낮인가. 환란의 거리에 쏟아져 지나는 이들, 박쥐 선글라스와 마스크에 얼굴을 묻고 한 떼의 승냥이처럼 도시를 배회한다.

선의 대명사인 배트맨의 검은 망토도 해를 가리고, 악의 무리 조커의 붉은 외투자락도 해를 가리고 있다. 절대선은 어디 있고, 우리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고담시(Gotham City)'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따 붙인 도시다. 그 이름은 이미 절망의 아이콘이다. 행정력이 닿지 않아 범죄가 끊이질 않고, 원칙이 사라져 사고가 잇따르는 도시. 한때 사고가 연이어 터지면서 대구를 빗댄 말로 유행하기도 했다.

시인은 이를 염두에 둔 듯하다. 고담(Gotham)을 고담(古談)으로 명기한 것, 말(言)이 불(火)이 되는 배척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인가, 문학적 힘이 오래 지속된 대구를 긍정하는 말일까.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배트맨(Batman, 1989)

감독:팀 버튼

출연:마이클 키튼, 잭 니콜슨, 킴 베이싱어

러닝티암:126분

줄거리:범죄와 부패, 탐욕의 도시 고담. 밤이면 무법천지가 되는 이곳을 지키는 밤의 수호자 배트맨이 있다. 모두가 배트맨의 정체를 궁금해 하지만 사실 배트맨은 백만장자 브루스 웨인(마이클 키튼)이다. 해가 지고 고담시의 악당이 나타나면 웨인의 저택 지하에 있는 초현대식 박쥐 동굴에서 하이테크 갑옷을 입고 범죄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조커(잭 니콜슨)다. 창백한 얼굴에 안면신경이 파손돼 늘 웃고 있지만, 즐거움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무시무시한 악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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