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은하 대통령 자포드

입력 2008-08-23 06:00:00

인류사에서 조선 사대부라 일컬어지던 선비만큼 독특한 가치관을 가진 계급 집단도 없을 것입니다. 폭우로 도포가 다 젖어도 뛰는 법이 없고, 마당에 널어둔 곡식이 빗물에 떠내려가도 글 읽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구한말 때 있었던 풍경이라고 합니다. 더운 여름날 벽안의 선교사들이 테니스를 즐기느라 땀을 뻘뻘 흘립니다. 마침 그 옆을 지나던 사대부 한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저렇게 힘든 걸 왜 직접 하나? 아랫것들 시키지."

지구촌 축제 베이징 올림픽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수많은 세월을 땀방울로 담금질한 운동선수들의 뼈와 살, 몸짓 하나하나에 국민들은 열광하고 감동합니다. 지난 2002년, 2006년 월드컵 때처럼 베이징 올림픽 역시 고달픈 삶에 지친 국민들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이 금메달을 한 개 딸 때마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1%씩 올랐다고 합니다. 촛불 정국을 거치면서 한 자릿수까지 추락했던 지지도가 최근 한 일부 여론조사에서 30%대까지 급반등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탈정치·탈이념을 표방하는 지구촌 축제가 이웃나라 정치 지지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니 참으로 묘한 것이 민심이고 세상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포츠가 연출하는 각본 없는 드라마를 보는 동안에는 어지러운 정치상황과 경제 문제, 세상사도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재미 때문에 사람들은 스포츠에 몰입하는 것인데, 위정자들은 이를 체제 결속 및 정치적 입지 강화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민감하고 껄끄러운 국내 현안으로부터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는 도구로 스포츠를 이용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스포츠는 국민들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는 3S(스포츠·섹스·스크린)로 변질됩니다.

더글라스 아담스의 SF 풍자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는 우스꽝스런 은하 대통령 자포드가 등장합니다. 머리가 둘, 자아도 둘인 그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자포드가 은하 대통령에 오른 내막이 시니컬하면서도 아이러니합니다. 그는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아니라, '권력으로부터 대중의 관심을 돌려놓기 위해' 선출된 허수아비 같은 존재입니다.

잔치판에는 잇속을 챙기려는 이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중국은 엄청난 물량 공세와 인해 전술로 개막식을 치장했지만, 블록버스터급 스펙터클 안에는 노골적인 중화 패권주의가 가득했습니다. 중국은 올림픽을 통해 모든 것은 중국으로 통해야 한다는 '팍스 차이니즘'을 보여주고 싶었겠지요.

올림픽에 열광하는 우리나라 매스컴도 겉으로는 결과보다 과정이 아름답다고 외치지만, 결국 관심은 금메달로 쏠립니다. 획득한 금메달의 수가 국가 종합순위가 되는 '공신력 없는' 순위 놀음이 4년마다 되풀이됩니다. 순수 아마추어리즘의 향연이라는 올림픽에서 국가 종합순위를 매겨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사회의 경쟁 만능주의 풍조가 올림픽에도 투사된 것 같아 씁쓸합니다.

이번 주 주말판에는 우리나라 매스컴들이 금메달 수로 국가 종합순위를 매기는 연유를 알아봤습니다. 아울러 푸틴 총리와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양립하고 있는 러시아의 권력구도도 다뤘습니다. 권력욕의 화신 푸틴이 내세운 꼭두각시 대통령을 보니 은하 대통령 자포드가 떠오르는군요. 편안한 주말 되십시오.

김해용 기획취재부장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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