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실라오
시칠리아 왕국의 외딴 섬, 요새 안에 지은 감옥. 사형수 네 사람이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다. 남작 인가푸, 시인 살림베니, 병사 아제실라오, 학생 나르시스. 모두 국왕 암살기도 혐의로 내일 아침 참수될 예정이다.
죽기 전날 밤 네 사람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쩌다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됐는지 털어놓는다. 아제실라오가 이야기할 차례다.
아제실라오는 자신이 살아온 날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어머니는 집시였습니다. 이곳저곳 떠돌며 공연으로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어느 날 삼촌들이 밭에 야채를 캐러 간 사이 웬 기병대 군인이 어머니와 이모 앞에 나타났지요. 군인은 두 여인을 강간하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기병의 귀를 물어뜯어 동생(이모)이 도망칠 시간을 주었습니다. 이모는 도망치고 어머니는 기병에게 겁탈당해 몇 달 후 아이를 낳았습니다. 나였지요. 나는 수도원에서 자랐습니다. 늙은 신부는 죽기 전 내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해주며 어머니의 유품을 주었습니다. 청금석 자루가 달린 단검과 집시 여인들이 무대에서 걸쳤을 목걸이와 종이쪽지였습니다.
쪽지에는 '아들 아제실라오에게. 단검의 주인을 찾아라. 그러면 넌 네 아버지를 찾은 거란다. 네 아버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란 작자가 군인임을 알았기에, 아버지를 찾기 위해 입대했습니다. 나는 군대를 따라 여기저기를 떠돌았습니다. 오랜 세월 떠도느라 종종 아버지를 잊기도 했습니다. 또 때때로 내가 저지르는 '범죄'는 스스로 사면하면서 아버지의 범죄에 대해서는 엄격한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날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막사 문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데 대령 계급장을 단 한 낯선 기병장교가 내게 손짓하며 말고삐를 맡겼습니다. 장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먼지를 뒤집어썼고, 지저분한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분명하게 알아보았습니다. 그가 막 돌아서던 순간 오른쪽 귓불이 잘려나간 걸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와 같은 피를 가진 남자, 나를 만들어낸 남자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의 잔인한 입은 나의 입과 닮았고, 사나운 암컷에 물어뜯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증오가 내 입술에 피어올랐지만 나는 이성과 냉정을 되찾았습니다.
대령은 군대를 정비할 목적으로 병사를 모집했습니다. 나는 지체없이 자원했고 그의 곁에서 보좌관 겸 연대기수로 근무했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나는 천천히 진실을 캐내며 과거를 확인해나갔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옷을 갈아입고 있었지요. 그는 통풍으로 퉁퉁 부은 발에 군화를 억지로 신고 있었지요. 흘러내린 바지 사이로 죄의 근원, 내 생명의 근원, 축 늘어진 검은 물건이 보였습니다. 나는 청금석 자루가 달린 단검을 그에게 보여주며 '혹시 그 단검을 본 적이 없는'지 물었습니다.
나는 시체 옆에 한동안 앉아 있다가 푸줏간 주인처럼 온몸에 피를 묻힌 채 체포됐습니다. 이후 인가푸 남작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고, 반정부 활동을 펼쳐왔지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남작님이 나를 고독한 생활에서 구해주었고, 난 조국에 정착해 여러분과 함께 있었고, 이 숭고한 상황에 놓이게 됐습니다.'
곧 죽게 될 아제실라오가 거짓말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는 실제로 군복무 시절 상관을 살해했다. 그러나 그가 살해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여자를 놓고 치졸한 싸움을 벌이다가 상관을 살해했을 뿐이다. 물론 집시 어머니의 유언은 사실일 것이다. 말하자면 계급을 무기로 예쁜 여자를 가로챈 상관을 살해하고, 거기에 '어머니 복수'를 명분으로 덧칠한 셈이다.
아제실라오뿐만 아니라 네 사람은 모두 사실에 약간의 거짓말을 덧칠함으로써 자신을 변명한다. 이들에게 '왕정중단'을 위한 테러도 사실은 사적인 분노, 복수심 혹은 결핍에서 시작된 일이며, 우연히 손에 넣고 보니 괜찮은 명분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 좋은 명분을 깃발처럼 흔든다. 깃발 아래 숨어 있는 한 그들은 파렴치한 악당이 아니라 '지사'인 셈이다.
죽음이 임박해도 사람은 '명분'을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어쩌면 '죽어야 할 상황'이기에 더욱 명분을 만들고 싶은지도 모른다. 자신이 저지른 파렴치한 범죄에 그럴듯한 명분을 부여함으로써 면죄받고 싶은 것이다. 자신에 대한 사형집행 역시 범죄에 대한 '단죄'가 아니라 '순교'로 격상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민주화' '언론자유'를 외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혐의가 짙은 사람들이 있다.
소설 속 네 사람의 거짓말은 '상대를 속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신을 속이기 위한 것'에 가깝다. 상대를 속이는 거짓말이 약간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은 '존재에 대한 위로'인 셈이다. 매일 아침 추한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바라보아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 것이다. 어쩌면 거짓말로라도 자신을 속이고, 위로하려는 사람은 구원 가능성이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난 원래 그런 놈이야'라고 대꾸하는 작자는 대책이 없다.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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