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불황속 날개 단 대구 관문시장 '구제 골목'

입력 2008-07-15 09:39:53

젊은 쇼핑족 "가끔 명품 건지면 횡재죠"

▲ 170여개 점포가 들어선 관문시장 구제골목.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170여개 점포가 들어선 관문시장 구제골목.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지난 12일 오후 3시쯤 대구시 남구 서부정류장 뒤편에 자리잡은 관문시장 내 속칭 '구제 골목'. 폭 3m, 길이 120m 남짓한 골목 양쪽에는 170여개의 옷가게들이 촘촘히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두세평에서 대여섯평까지 크기는 다르고 '구제전문''○○패션''△△샵' 등 보일 듯 말 듯한 간판도 제각각이었지만 어느 나라에서 건너온지 모를 다양한 옷들이 진열대에 가득한 건 마찬가지였다. 사람 다니기도 비좁은 공간이지만 마네킹까지 동원해 어엿한 패션매장 분위기를 연출한 곳도 있었다.

"천원만 더 빼줘요." 방금 산 옷 봉지를 든 주부 이도연(37·서구 평리동)씨는 "방학을 맞아 버스를 타고 아이들 옷을 사러 왔다"며 가게 주인 김모(47·여)씨와 가격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1만원을 내고 반바지 두 벌을 고른 이씨는 결국 1천원을 거슬러 받았다. 이씨는 "처음에는 구제라 꺼림칙했지만 상태가 좋은 옷을 잘 고르면 횡재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관문시장 구제골목이 불경기 속 호황을 누리고 있다. 서부정류장 인근이어서 지하철, 버스 등 접근성이 좋은데다 상점도 밀집돼 있어 쇼핑하기에 편리하다는 장점이 손님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

특히 고유가와 물가 상승에 지친 알뜰 주부들이 속속 모여들면서 최근에는 10여개 점포가 새로 문을 열었다. 지난달 가게를 열었다는 허은주(45·여)씨는 "장사 밑천이 적게 드는 반면 손님은 많다는 정보를 듣고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도 구제 열풍에 한몫했다. 민소매 티셔츠, 짧은 치마, 샌들 등 본격적인 여름나기 준비에 한창인 젊은 쇼핑족들이 이색적이면서도 값싼 패션 소품을 찾아 관문시장 구제골목을 찾고 있는 것. 대학생 이지은(22·여·남구 봉덕동)씨는 "말로만 듣던 구제 전문점에 처음 와 봤는데 말만 구제지 새옷과 다름없다"며 "가끔 명품 브랜드를 건지는 재미도 있다더니 과연 유행에 뒤지지 않는다"고 웃으며 말했다.

인근에서 다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44·여)씨는 "주위에서 이곳을 소개해줘 처음 와 봤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옷의 질이 좋고 값도 싸다"며 "구제라도 연출만 잘 하면 촌스러운 새옷보다 훨씬 낫다"고 말했다.

20여년간 관문시장에서 옷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정순자(57·여)씨는 "찾아오는 손님 수는 조금 줄었지만 오는 손님 대부분이 물건을 사서 간다는 점이 달라졌다"며 "요즘에는 중구 교동, 남구 봉덕동 등 시장 상인들까지 이곳에서 물건을 떼갈 정도"라고 말했다.

'구제(舊製)'라는 말은 오래 되고 낡은 옷을 말하는 재래시장 용어. 미국, 일본, 캐나다 등에서 들여오는 게 보통인데 요즘은 아파트, 주택가 등 헌옷 수거함의 쓸만한 옷들이 구제로 둔갑하기도 한다.

사람들 손길에서 한번 버려졌던 구제들은 서울, 부산 등의 대형 재래시장에서 100kg짜리 포대 단위로 소매상들에게 팔린다. 먼지를 날리는 포대 속의 옷들 중 상당수는 너무 낡아 팔기가 어렵지만, 잘 하면 몇만원짜리도 곧잘 건진다고 상인들은 말했다.

제 수명을 다하기 전에 혹은 미처 제 멋을 펼치기도 전에 버려진 옷들이 세탁과 수선을 거쳐 이곳에서 두번째 삶을 준비하고 있다.

임상준기자 zzu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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