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문화] 경주 이견대 유감

입력 2008-05-24 07:06:29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에는 사적 제159호로 지정된 이견대(利見臺)가 있다. 대왕암이 곧장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바로 이웃하는 감은사와 더불어 신라 문무왕의 호국전설이 깃든 역사공간이다. 또한 이견대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만파식적 설화의 현장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현재의 이견대 자리가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크게 받기 시작한 때는 1967년 5월 무렵이었다. 이 당시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의 활동으로 동해구에 위치한 문무대왕유적이 일괄조사될 때에 이견대의 위치도 그 조사대상에 함께 포함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까지도 그저 입으로만 전해지던 이견대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했던 모양이었다. 이 와중에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도로변의 보리밭을 파보았더니 이곳에서 건물터의 흔적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곧 이견대의 위치를 확정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조사결과에 따라 문화재관리국은 이곳을 지체 없이 국가사적지로 지정고시하기에 이르렀으며, 더욱이 지난 1979년에는 이곳에 이견정(利見亭)이 새로 건립되어 사람들에게 이견대의 존재와 그 위치를 더욱 각인시켜주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몇 해 전에 지금의 이견대 자리가 잘못 고증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직접 거론한 사람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계의 원로 황수영 박사였다. 특히 그는 1960년대 이후 석굴암의 수리공사를 주도했고 문무대왕 해중릉의 성격규명이라든가 이견대의 위치 확인에 있어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장본인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러한 그가 어느 신문에 연재한 '불적일화'라는 회고담을 통해 털어놓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67년의 시굴 직후 나는 일단 이견정의 위치를 발굴지로 비정하기는 하였으나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보이는 '축성(築成)'의 자취를 찾지 못한 것이 못내 개운치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95년 가을 예전에 최남주 선생이 말하던 산 위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곳은 대본초등학교 뒷산으로, 현재의 이견정에서 국도를 건너면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나는 그의 인도로 산 위에 올라가 보았는데, 과연 1천300∼1천600여㎡(약 400∼500평)의 너른 대지가 있고 그 삼면에 인공으로 축석된 자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부근에 신라시대 와편이 보였고, 또한 커다란 민묘와 석비 1기가 있었다. 석비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인데, 비문 가운데 '이견대(利見坮)'라는 글자가 보이기도 하였다."

이와 아울러 그는 "현재의 이견대 자리는 조선시대에 설치되었던 역원인 이견원(利見院)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였다.

하지만 참으로 희한한 일은 이러한 견해가 공개적으로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이견대의 위치를 재고증해 보려는 아무런 공식적인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해 소관부처인 문화재청 역시 "구체적인 학술적 연구성과가 제시되지 못하고 있으므로 현행 이견대의 위치변경지정이나 사적지 해제 등은 결정되기 어려우며, 다만 해당 관리단체인 경주시에 통보하여 이에 대한 검토를 요청할 것"이라는 정도의 반응을 나타냈을 뿐이었다.

누구든지 스스로의 오류를 흔쾌히 털어놓고 바로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평생을 이 분야에 종사해온 노학자의 어려운 고백을 애써 흘려듣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 그리고 이견대의 원래 위치는 과연 어디가 맞는가?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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