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에서 맛보는 '산촌유학'

입력 2008-02-16 07:57:14

산과 들 친구 삼아 '제대로' 놀아보자

경남 함양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다. 88고속국도를 달려 함양나들목을 빠져나온 뒤 함양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목적지인 마천을 알리는 표지판에 눈에 들어온다. 함양에서 지리산으로 넘어가는 오도재를 지키는 '지리산 제일관문'을 넘어서 삼봉산 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함양군 마천면 창원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2시간을 내리 달려 이곳까지 온 이유는 '햇살네'를 만나기 위해.

◆사랑이 묻어나는 햇살네

햇살네는 지리산 자락 시골마을에서 '산촌유학'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김일복(32·여) 씨의 별칭이다. 아이 셋을 둔 주부답지 않게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서 앳된 느낌마저 들게 했다. 맏이는 '맑음이'라는 애칭으로도 통하는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인 현승이, 둘째는 겨우내 추운 줄도 모르고 바깥에서 얼마나 뛰어놀았는지 볼이 빨갛게 언 듯한 다섯 살 노을이, 막내는 이제 세상에 나온 지 여덟 달째를 맞이하는 연두. 그리고 세 남매의 아버지이자 별명이 나무꾼인 강남욱(46) 씨. '시골살이'(햇살네는 산촌유학이 주는 약간의 환상을 걷어낼 수 있는 말이라고 했다. 시골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 그 자체가 모두 배움이라는 마음을 담았다)를 함께 나눌 주인이자 친구들이다.

'햇살과 거닐며 놀다'라는 네이버 블로그(blog.naver.com/hieri)를 들여다보면 지금까지 이곳을 찾아온 도시 아이들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난 겨울방학 3박 4일 일정으로 찾아온 아이들을 위해 블로그에 남겨놓은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영화 에 나오는 집보다 조금 좋은 집입니다.' 선물로 들고 간 귤 한 상자를 어깨에 둘러메고 햇살네를 따라 찾아간 그 '집'은 솔직히 영화보다 나을 게 없었다. 행여 햇살네가 서운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도심에서 반듯반듯한 네모집들만 보고 자란 아이들은 '에계계?'라며 한숨을 내쉴 법한 집이다. 하지만 집은 바깥에서 감상하기 위해 짓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생활하기 위한 공간이다. 그리고 따스함과 사랑이 가득 차야 하는 공간이다. 댓돌 위에 신발을 벗어두고 올라선 거실(작은 시골 방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한 쪽에는 책꽂이가, 다른 한 쪽에는 자그마한 부엌이 붙어있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작네요.'라고 말을 꺼내려다 괜시리 집 크기에 연연하는 도시 촌사람처럼 여겨질까봐 말을 잠갔다. 찬찬히 둘러보자 한 쪽 벽면에 사랑 가득한 햇살네 다섯 가족의 일상이 담긴 사진이 가득 붙어있다.

◆자연과 노는 법 배우기

"환경단체에서 일하면서 지난 2000년 일본의 산촌유학을 소개한 글을 봤는데, 그 순간 '나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을 방문해 잠시 보조교사로 활동했고, 이후 학기 중과 방학에 소규모 자연놀이를 하며 산촌유학을 준비했습니다. 비록 초기 형태이기는 하지만 2001년 가을부터 이곳 창원마을에서 햇살네 교류학습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학기 중에 2주 또는 한 달 프로그램으로 시작한 것은 2003년부터인데, 기간은 제법 길지만 실제 다녀간 아이는 30명 정도입니다. 이번 겨울방학에는 맛뵈기 차원에서 3박 4일짜리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10명 정도가 다녀갔어요. 이들 중 일부는 학기 중 교류학습을 신청합니다."

산촌유학도 여러 형태가 있다. 햇살네처럼 농가에서 생활하며 '교류학습'을 하는 형태가 있는가 하면, 산촌유학센터에 머무는 경우도 있고, 아예 농촌학교로 전학을 오기도 한다. 어느 곳에서 산촌유학을 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하지만 생활은 비슷비슷하다. 들과 산을 친구 삼아 마음을 열고 노는 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산촌유학이다. 햇살네는 아이들의 감수성에 무게를 둔다.

"방학 중에는 하루 종일 뛰어놀게 하는 것이 일입니다. 자연이 얼마나 훌륭한 친구인지 깨닫게 되죠. 학기 중에는 방과후에 마음껏 뛰어놀고 함께 온 아이들과 저녁을 먹고 책상에 둘러앉아 공부도 합니다. 뒷산에 올라가 나물도 캐고 땔감도 구해오고, 직접 설거지도 하고 책상도 스스로 정리합니다. 척박한 도시생활을 하면서 마음의 문을 닫았던 아이들이 조금씩 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TV를 보거나 컴퓨터를 하지 않으면 심심하다고 칭얼대던 아이들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됩니다. 제대로 노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시골살이의 건강한 후유증(?)

다행히 이곳은 인근 학교와의 교류가 잘 되고 있다. 교류학습과 산촌유학의 취지를 잘 이해해 주는 덕분에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도시 아이들이 적응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승이, 노을이와도 금세 친해지고 학교나 동네 친구들과도 하루 이틀만 지나면 허물없는 사이가 된다. 물론 어려움도 있다. 급작스레 바뀐 환경 때문에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던 아이가 갑자기 식욕을 잃기도 하고 감기도 아닌데 열이 나기도 한다. 고비를 넘기면 아이들은 빠르게 변한다. 시골살이 후유증(?)도 있다. 예전에 학교 갔다가 학원가고 숙제부터 해놓고 놀던 아이가 운동장에서 놀이터에서 실컷 뛰어놀고 돌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엔가 짓눌린 듯 보이던 아이들은 성격도 쾌활해지고 스스로의 일을 책임있게 해낸다. 그렇다고 해서 산촌유학을 대안학교나 치료소 같은 개념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올해에는 부모 참여형 교류학습도 시작해 볼 생각입니다. 중학생들도 받을 수 있으면 좋겠고요. 공간이 부족하지만 이웃 할머니 댁에서 지낼 수도 있고, 작년에 문을 연 보건소 덕분에 갑작스레 아프다고 함양까지 달려갈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아이는 아이답게 커야 합니다. 부모가 바뀌지 않는데 아이만 변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지리산 자락에서 함께 변해보는 것도 좋겠죠?"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사진제공 : 햇살네

* 지난 1월 중순 햇살네에서 3박 4일을 보낸 박준범(초3) 군이 쓴 일기

산으로 향해서 나무를 하러 갔다. 나는 톱으로 나무를 베는 역할을 하였다. 나는 조그마한 나무를 자르고 있었는데, 아주 썩어가는 나무가 10m 정도 자라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를 톱으로 자르려고 하였다. 나는 온 전력을 다해 잘랐다. 나는 그 힘도 모자라서 옛날에 어머니한테서 먹은 젖 2년치를 다 썼다. 쿵 갑자기 나무가 쓰러졌다. 내가 해냈다고 방방 뛰었다. 난 나무를 자르는 것만 봤지 직접 못하였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직접 해봤다. 정말로 기분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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