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기 삼보회장 별세…향년 81세

입력 2008-02-11 10:52:49

김용기(81·전 대구경영자협회장) 삼보 회장이 10일 오후 숙환으로 별세했다. 1926년생인 김 회장은 62년 대구 검사동에서 성화산업사를 창업, 섬유업에 뛰어든 뒤 삼보, 삼보염직 등을 잇따라 설립하면서 지역 섬유업계를 이끌었다. 부직포 개발에 앞장섰으며 직물 중심의 섬유산업을 비의류용으로 확대시키는데도 큰 공헌을 했다.

김 회장은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공장에서 뿐만 아니라 주로 작업복 차림으로 활동해 검소한 기업인의 대표로 꼽히기도 했다.

1984년부터 17년간 대구경영자협회장을 맡는 등 기업인으로서 대외활동에도 전력했으며 지역 노사 안정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통령표창, 동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1991년 광역의원 출마를 하려다가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선거비용 1억 원을 심장병 어린이재단에 희사, 찬사를 받기도 했으며 정치권으로부터도 러브콜을 받았지만 '기업인은 경영에만 충실해야 한다.'며 끝내 고사한 일화는 유명하다.

유족으로는 윤석(삼보 대표), 강식(한대 대표) 씨 등 두 아들과 희경, 정하 씨 등 2녀가 있다.

발인은 12일 오전 6시 대구모레아장례식장, 장지는 영천시 청통면 원촌리이다. 053)813-5961.

모현철기자 momo@msnet.co.kr

◆김용기 회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너무나 큰 충격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근래 우환으로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렇게 급히 우리 곁을 떠나시리라 생각지는 못했습니다. 회장님을 모신 빈소에서, 문득 공직에서 처음 만나 70여년간을 때로는 동료와 동지로, 때로는 지기지우(知己之友)로 살았던 지난날이 주마등같이 지나갔습니다. 회장님이 가신 빈 자리가 너무나 넓고 허전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경제인에 대한 평가가 혼미스러웠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회장님은 우리 시대에 지역에서 기업을 해오시면서 경제인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분명하게 행동으로 바로잡아주신 분이었습니다. 자신에게는 인색하면서 남에게는 후덕하셨던 인품은 당신이 경영하셨던 기업의 화합과 능률을 가져왔고 대구사회의 노사평화를 선구하셨습니다. 일생에 걸쳐 실행한 금욕적 절약은 지역 최고의 봉사단체를 존경스럽게 이끌게 했습니다.

젊은 시절, 축산을 했을 때 손수 날라다 먹인 잔반으로 돼지를 너무나 깨끗하고 토실하게 길렀던 성실성과 공장에서 손수 청소하고, 보일러에 불을 지피다 중화상을 입기도 했던 기업에 대한 남다른 열정. 헛간에서 연사기 두 대로 시작한 공장이 마침내 미싱사 생산에서 전국 1위를 차지했던 탁월한 경영능력. 그것이 이제 (주)삼보염직, (주)삼보, (주)한대를 창업하는 밑거름이 되어 지역경제에 큰 역할을 하고있는 사실은 회장님의 입지전(立志傳)적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회장님의 업적은 자신의 기업활동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노사문화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던 1984년부터 2001년까지 대구경영자 총회장직을 맡아 처음으로 대구에 노사평화를 가져오신 것은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일생 직물업에 바친 회장님의 길은 섬유산업의 사양화 논란 속에서도 부직포생산 전국 1위 등 신섬유산업 개척으로 희망의 빛을 던져주셨습니다. 상공회의소 고문직에 계시면서 대구경제 전체의 방향을 걱정해오신 회장님은 분명 대구경제계의 거인이었습니다. 경제에만 몰두하시지 않고 소외된 이웃과 국가유공가족들에 온정의 나눔을 이끌어온 금호회의 회장직을 맡았고, 국가의 통일과 남북교류에 관심을 가지시어 민주평화통일 정책자문회의 대구부의장을 맡으셨던 일은 경제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뜻깊은 헌신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회장님! 번다한 이승의 과업들은 뒤로하시고 편히 쉬십시오. 그동안 하신 일, 범인이 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그 큰 걸음이 남기신 족적을 남은 저희들이 더 열심히 빛나게 하겠습니다.

국제염직 회장 李昇柱 謹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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